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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연(偶然)을 운명(運命)으로 바꾼 사람들" - 4.20,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1-04-20 조회수683 추천수8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4.20 성주간 수요일(장애인의 날)

이사50,4-9ㄱ 마태26,14-25

 

 

 

 

 

"우연(偶然)을 운명(運命)으로 바꾼 사람들"

 

 

 

오늘은 ‘운명’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국어사전의 말뜻을 찾아 봤더니

‘인간을 지배하는 필연적이고 초월적인 힘,

  또는 그 힘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길흉화복.

  타고난 운수나 수명’으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또 비슷해 보이는 ‘숙명’이란 말뜻을 찾아봤더니

‘날 때부터 타고난 운명,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얼굴은 마음이자 운명입니다.

하여 요즘은 연민의 마음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대하게 됩니다.

 

‘우연을 운명으로 바꾼 사람들’,

오늘 조간신문에 ‘깊은 삶(deep life)’이라는 책을 소개하며

붙은 표제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

우연에서 복된 운명으로 바뀌어 진 우리 인생입니다.

또 ‘길, 人, 삶’ 이란 이 연재물을 마치며 쓴

어느 시인의 글 표제가 생각납니다.

 

“세상 도처가 눈물겨운 고향, 돌아가야 할 집이다.

  어디서나 묵묵히 ‘주인’ 되어 사는 사람들,

  꽃보다 아름다운 이들 있어 비로소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되었다.”

 

세상 도처에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어

꽃보다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 있어 세상을 살 만한 곳입니다.

어제 마침 휴게시간에 제 형님들에 대한 이야기 도중

‘모두가 하늘과 관계가 있네요.’라는

어느 수도형제의 말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하늘 천(天)자가 들어가는 말들도 떠오릅니다.

천재, 천수, 천품, 천성 등

하늘 ‘天’자가 상징하는바 역시 타고난 운명입니다.

50-60년대는 너나할 것 없이 생존에 급급했기에

학교가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하여 저희 형들은 모두 학비가 저렴한 국립을 택해

큰형은 항공대학, 둘째 형은 공군사관학교, 셋째 형은 사범학교,

저는 교대에 진학했는데

잘 들여다보면 모두 ‘하늘’과 관계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하늘’ 길의 수도여정에 올랐고

세분 형님 중 두 분은 하늘과 관련된 학교에 역시 세례를 받아

세 분 다 ‘하늘’ 이름을 받았으며

요 몇 년 사이에 첫째, 둘째 형님이 하늘로 歸天하셨고,

남은 셋째 형님 한 분도 귀천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人命은 在天이라 하는 데 이 또한 하늘 운명입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복된 운명입니다.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가 만들어가는 운명입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는

자기 운명에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만들어가는 운명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잘 믿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우연에서 아름다운 운명의 얼굴로 변모되는 것을 감지할 것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얼굴과 유다의 모습이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하느님과 주님의 종으로서의 예수님이

최고의 합작품의 결과가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운명에 순응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모습이 그대로 들어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주시니,

  …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온통 주 하느님이 주어가 된 삶을 살았던,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았던 주님의 종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느님만 예수님의 운명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 또한 하느님의 운명이셨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운명이 된 주님의 종의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다음 고백은

그대로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하려는가?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오늘 복음의 대목에서

하느님의 뜻인 운명에 기꺼이 순종하는 예수님의 진면목이 잘 들어납니다.

하느님의 때를 잘 알아 그 때에 자신을 맞추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열 두 제자들 가운데 배반자 유다가 있었다는 게 신비요,

이 또한 예수님의 운명입니다.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란 말에

모두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불안한 심정으로 묻기 시작 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깨닫지 못한 확신이 없는 제자들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정말 예수님이 자기의 운명임을 확신했다면

이런 자신 없는 물음은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운명은 하느님과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기에 공동책임입니다.

전적으로 하느님 책임이 아닙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유다에게도 그 운명의 책임이 있다는 주님의 탄식 말씀인데

이 또한 예수님의 운명이자 유다의 운명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한 복된 운명의 예수님과는 달리

하느님을 멀리한 유다의 불행한 운명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복된 운명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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