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주님 만찬 성목요일 2011년 4월 2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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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1-04-21 | 조회수525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주님 만찬 성목요일 2011년 4월 21일
요한 13, 1-15. 1고린 11, 23-26.
오늘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만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하신 이별의 식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식사 중, 제자들에게 성찬 의례를 남기셨습니다. 오늘 제2독서로 들은 고린토1서는 그 성찬 의례를 소개합니다. 예수께서는 빵과 잔을 각각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는 말씀으로 그 의례가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하는 것이라는 말씀도 남겼습니다.
이 서간에서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성찬 의례를 중심으로 오늘의 미사가 발생하였습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복음서를 비롯한 성경 말씀들을 듣고, 성찬으로 주님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어떤 실천을 발생시킵니다. 예수님은 ‘내어주고 쏟는다.’는 말씀으로 우리의 어떤 실천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며, 그들을 고쳐주고 살려주면서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일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유대인들에게 인간관계이고 피는 생명입니다. 스스로를 내어주는 인간관계. 스스로를 쏟아서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생명을 자기 것으로 하라는 성찬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좁은 시야에 갇혀서 삽니다. 그 시야 안에서는 재물과 권력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는 착시(錯視) 현상도 일어납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세상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노력도 하지 않게 되는 착시 현상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나의 생명이고 또한 내 이웃들입니다. 베푸신 분이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사랑하여 그분의 생명을 사는 그분의 자녀 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었고 그 가르침을 요약해서 담은 성찬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에 대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리를 꿰뚫어 알고, 완전함을 지향하며 살지도 않습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생존이 어떤 베푸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찾아내어 기뻐하는 목자와 같은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 마음을 배워 실천하며 살겠다는 결의가 담긴 호칭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최후만찬에서 예수님이 유언으로 남긴 성찬에는 당신의 몸이라는 빵을 먹고, 당신의 피라는 잔을 마시면서, 그분의 삶을 실천하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 곧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는 최후만찬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며 살겠다는 새로운 계약이 성찬이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최후만찬 식탁에 앉으셨다는 것만 말하고 즉시 제자들의 발을 씻긴 이야기로 건너갑니다. 이 복음서는 식탁에서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를 들고 하신 말씀들을 생략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은 이야기를 모릅니다. 요한복음서는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들은 먼저 기록된 세 개의 복음서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서들이 전하는 최후만찬을 기념하여 성찬을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최후 만찬에서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를 들고 하신 말씀을 새삼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대신 저자는 이 복음서에서 최후만찬을 기억하여 발생한 성찬이 우리를 위해 지닌 의미를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성찬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 끝나는 허례허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님은 식탁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십니다. 사실은 식탁이 있는 식당은 음식을 먹는 장소이지 발을 씻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이런 무리를 하면서, 예수님이 최후만찬의 식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발을 씻는 것은 종이나 노예가 하는 일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남기신 성찬이 우리를 겸손한 섬김의 새로운 실천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고 말하면서 완강하게 사양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받지 못한다.’ 종이 하듯이 섬기는 이 일에 참여하지 않으면, 예수님으로 발생한 새로운 계약의 관계, 곧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몫을 나누어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발 씻음이 의미하는 종과 같은 섬김을 우리가 실천할 때,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같은 몫을 나누어 받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더 훌륭하게 만들어주지도 않고, 사람들 앞에 더 영광스런 신분을 주지도 않습니다. 성찬, 곧 우리가 거행하는 미사는 우리를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으로 초대합니다.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삶이 섬김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이 우리를 위한 새로운 계약, 곧 하느님 자녀의 몫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깁니다.
요한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저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고 고백하였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미사에 참여하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실천한 섬김은 우리 안에 커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의 착각과 망상은 작아져야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허무의 심연 위에 잠시 떠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충만히 살아계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보잘것없는 섬김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섬김의 새로운 계약을 실천하여 그분은 우리 안에 커져야 하고, 과대 포장된 우리는 작아져야 합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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