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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04-22 조회수623 추천수5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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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년 이맘 때 성주간에 진천에 있는 신자들 다 끌고 가서 뭘 보았느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청주극장을 전세 내어 성주간 화요일에 화장지 열통쯤 사가지고 갔었지요.

그 영화를 만든 감독 멜깁슨은 영화배우 겸 감독이며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것을 주장하는 열심한 가톨릭신자입니다.


멜깁슨이 어느 날(10여년전) 다락방에 올라 가 책을 찾다가 앞에 뚝 떨어지는 것이 있어서 펴보니 지금으로부터 300여년전 봉쇄수녀원에 계시던 수녀님이 환시 중에 본 예수님의 수난을 기록한 책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금서목록에 들어 간 책이었으나, 50년 전부터 풀리면서 책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멜깁슨은 이 책을 보고 땅을 치고 통곡하며

‘내가 살아서 이 책을 꼭 영화로 만들리라!’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따라서 10여년 동안의 준비를 거쳐 제작자들을 만났으나~~

제작자들의 대부분이 유다인들이라 이 영화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지요.

멜깁슨은 자신의 전 재산 약 300억원을 털어 그 영화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등장인물 중에 마리아는 유다인이고, 예수는 씨애틀의 미국신자였습니다.

CNN이나 다른 뉴스를 보면 지명수배 되었던 범죄자가 자수를 하고, 애인을 찔러 죽였던 사람이 자수를 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회개하였습니다.


위대한 영재 하나가 만든 영화 하나로 얼마나 많은 세상사람들이 성화 되는 지요.

제가 기를 쓰고 피정을 하면 1년에 약 4만명의 신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 세계에서 약 15억이 보았습니다.

불교, 개신교, 회교신자까지도 보았습니다.

사탄에 사로잡힌 영화감독이 전 인류를 휘어잡는다고 하더라도~~

성령께서 신심 깊은 영화감독 하나를 택하시어 위대한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 영화 보면서 눈물이 나와요? 안 나와요?

눈물 안 나오면 인간도 아니지~~


예수님의 수난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많았어요.

첫째, 정화

사탄의 존재에 대해 깊은 묵상을 하게 합니다.

첫 장면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십자가 너 왜 지려고 하느냐!“

사탄이 하는 가장 큰 유혹은 십자가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발로 뱀의 머리를 짓밟으십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겟쎄마니 이전에 어디에서 처음 유혹하지요?

루가복음을 보면 사탄이 예수님께 세 번 지고 난 다음에 다음 기회를 노리고 떠나갔다.

그 다음 기회가 바로 게쎄마니 동산이었지요.

여기에서도 마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지고 가실 때 “너 지금도 늦지 않았어!”

그 맞은편에서 성모님이 마귀를 째려보시며

“너는 절대 내 아들 못 건드려! 내 아들은 제가 가야할 길을 가고 있어!”

사탄은 십자가상에서까지 유혹을 하며, 성부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지려고 하는 그 때까지도 집요하게 유혹을 하는 놈이 사탄입니다.


첫째,사탄은 크게 두 가지로 괴롭힙니다.

 1) 전인적인 부마

우리가 성서에서 보면 마귀 들린 사람이 지 몸 지가 짓찧고 하며 누가 봐도 이 사람은 마귀가 들렸다고 인정하는 사람을 말하며 사탄이 24시간 그 사람을 휘어잡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쉽게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고치기가 쉽습니다.

신자들이 쫓아와서 “신부님, 큰일났어요.” 하고 데리고 오는 사람들을 보면

자매님들이 팔을 붙잡고 있는데, 젊은 여자인데도 굵은 남자의 목소리를 내곤 합니다.

사탄에게 “네 이름이 뭐냐!” 하면 “나 좀 여기 놔둬라!”

이렇게 완전히 정체가 드러난 사탄은 떼기 쉽습니다.


 2) 과거의 상처나 악습을 휘어잡고 들어오며 내 자신이 마귀의 장난에 놀아나는 것을 모르는 경우입니다.

잠 마귀, 욕 마귀, 음란마귀, 사치스러운 마귀, 허영의 마귀가 있어요.

어느 신자를 보면 성당에 들어올 때까지는 눈이 땡글땡글한데 사제의 강론만 시작되면 평화의 인사를 합니다.

왜 그때 해?

그것 말씀을 못 듣게 하는 잠마귀입니다.

성서만 펴면 잠이 옵니다.


핸들만 잡으면 욕을 하는 욕마귀가 있습니다.

신자 중에 Taxi 기사를 하는 분이 있는데 핸들만 잡으면 욕이 나온답니다.

욕도 그냥 욕이 아니라 쌍욕을 해대니까, 십자고상을 보고 뒤에 앉은 손님들이

“보아하니 천주교신자 같은데 그 성상이나 떼고 욕하시오! 창피하게!” 한답니다.

“신부님, 이제 성사보기도 면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차 타기 전에 혀를 길게 빼고 성수를 좀 뿌려라!

장난기 비슷하게 말하고 잊었는데, 그 형제 나를 보더니

“신부님, 성수 발 끝내줍디다. 신부님께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욕이 나오려고 하면 혀가 안으로 말리며 꼬였어요, 이제 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


우리의 성사꺼리 90%가 혀로 짓는 죄입니다.

혀는 축복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사탄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모이면 욕하는 것은 욕마귀입니다.

사탄은 각 분야마다 안 건드리는 부분이 없습니다.

옆사람이 분별해 주지 않으면 본인 스스로 분별을 하지 못합니다.


사탄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집요하게 유혹합니다.

특별히 예수님 십자가상에서까지도 유혹을 했습니다.


임종이 가까워 오면 우리는 무슨 성사를 받습니까?

옛날에는 종부성사라고 했고 지금은 병자성사라고 하지요.

그 병자성사가 겉으로 보면 그냥 기름 바르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몸이 병들었을 때, 임종할 때 사탄이 치고 들어옵니다.

“하느님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너 하느님 거부해!”

 

 

우리가 죽기 직전에 하느님을 찬미하고 죽으면 영원히 하느님을 찬미할 것이요!

죽으면서 하느님을 저주한다면 죽어서 불 속에서도 하느님을 저주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약해지면 사탄은 “하느님 없어, 하느님 있다면 너 나이 40도 안 되어서 암이 걸리겠나?“

그래서 사제들은 영과 육이 약해지려할 때 성유로 빛이 나게 해 주어 마귀가 얼씬도 못하게 합니다.

 

놀랍게도 병자성사를 받고 죽는 신자가 50%도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병으로 누워 있는 사람들은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겠지만~~

심장마비나 차사고로, 냉담 중에 신부님께 미처 성사를 청할 시간이 없을 수가 있지요.

노인들이 중풍으로 말을 못하면 손짓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신부님 좀 불러달라고 하지만~~

새끼들이 못 알아듣지요.

이래저래, 요런조런 이유로 60%가 병자성사를 못 받습니다.

 

병자성사를 받는 것은 은총 중의 큰 은총입니다.

옛날에는 노자성사라고 했지요. 이 성사로 사탄은 얼씬도 할 수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병자성사까지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하룻밤 살아야 내가 하루를 살았구나!

아침에 학교 간 아이가 시체실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고가 나면 사제들은 사고가 난 곳으로 뛰어갑니다.

군종신부들은 총알이 날아오는 곳으로 뛰어가 죽어가는 사람을 끌어안고 기름을 발라주다가 같이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귀의 존재를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사탄은 추상이 아니고 실존입니다.


두 번째, 그 감독이 우리에게 주고 싶었던 화두는 오늘의 복음에 나오는 유다스가 지었던 죄의 원인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유다스는 공금을 횡령하였고 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썼습니다.

자꾸 꺼내어 쓰다보니까 열두명을 먹여 살리기가 어려워졌지요.

지금처럼 예수님 돕기 후원회가 있었던 것도 아니요.

온라인 구좌로 돈이 들어오지도 않았으니까~~

끼니때마다 밥하는 총무역할이 힘들었지요.

벼룩이 간을 내먹지~~

돈을 꺼내 썼으니까 채우기는 해야할텐데....

그런 그에게 유혹이 들어옵니다.

대사제들이 네 스승 우리에게 넘기면 은전 30냥 주겠다!

그 돈은 노예 한사람을 살 수 있는 돈이며, 열 두 장정이 석달 동안 먹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렇게 돈을 준다니까~~ 스승을 팔아넘길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 죽어라! 고 한건 아닙니다.

유다스가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내 몸 하나는 건사하시는 분이기에 끌려가시다가도 담 모퉁이를 돌아가실 때에 "짜자~잔!" 하고 다시 나타나실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면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유다스의 가장 큰 죄는 처음부터 자기중심, 자기본위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에수님께서 끌려가시어 가시관을 쓰시고 태형을 맞아 온 몸이 갈갈이 찢어지는 것을 보며 그 행동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며

‘내가 이런 놈은 아니었는데~~ 저 분이 왜 저리 힘없이 돌아가실까!’


유다스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성모님이 계신 다락방으로 왔더라면~~

베드로가 때려죽일려고 했어도 성모님께서

“베드로야, 너 이놈, 너는 뭘 잘했다고 그러냐~~ 니 꼬라지나 잘 해라!” 이러시면서 막아주셨을 겁니다.


유다스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난 안 돼, 내가 가면 성모님이 문도 안 열어 주실 거야~~’

자기중심으로 생각했기에 자기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뻔뻔한 놈, 그 죄 사해질 것 같으냐, 넌 절대 용서 못 받아!”

유다스의 가장 큰 죄는 자기중심적이었던 것이며 끝까지 절망한 것입니다.

만약 유다스가 성모님의 발을 붙잡고

“차라리 날 죽이시오!” 그랬더라면, 오늘 날 유다스는 성유다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즘 유다복음을 찾았다고 하는데, 거기에 유다스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예정조화설’은 인간의 운명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어서 지옥 갈 놈은  아무리 착실하게 살다가도 죽을 때는 지옥가게 되어 있고, 천당 갈 놈은 악한 짓을 하다가도 천당에 가게 되어 있다!

유다스는 처음부터 그렇게끔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다.

칼빈의 예정조화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개신교에서조차 이단으로 취급합니다.


늘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병 고치는 사람으로 생각하지요.

돈이 쪼들리는 사람은 예수님을 우리 형편이 펴게 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 예수님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조화된 균형감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느 신자는 너무 감성적이어서 어떨 때는 열심히 하지만 금새 식어버립니다.

지성적인 신자는 이론적으로만 알지,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어느 신자는 열심하긴 한데 무식해!

너무 무대뽀라 똥인지 오줌인지 가릴 줄 모르는 거야!

그런데 의지 하나는 끝내 줘!^^


신앙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세 번 째 성모님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 영화 보신 분~~

성모님께서 눈물을 흘리는게 쉬울까요? 안 흘리는 게 쉬울까요?

저는 그 영화 보면서 ‘어머니, 제발 좀 우셔요~~ 내 속이 터질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온몸이 갈갈이 찢어지며 태형을 맞으실 때~~

그 헝겊으로 예수님의 피를 닦으시는 모습을 보며 단장의 비애를 생각했습니다.

단장의 비애는 아기 원숭이를 어미 원숭이에게서 빼앗아 배에 태우고 가자, 어미원숭이가 해안선을 따라 가다 죽기에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고통이 바로 그랬을 겁니다.


십자가 지고 가실 때 사람사이로 따라가시며 예수님 앞에 절대 안 나타나십니다.

‘내 아들은 성부의 뜻을 향하여 가고 있으니 에미의 눈물과 격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절대 그럴 수 없다! 고 생각하십니다.


모성에는 합일의 모성이 있고, 분리의 모성이 있습니다.

합일의 모성은 늘 끌어안는 것입니다.

분리의 모성은 늘 멀리 보면서 기도하는 모성입니다.

이것이 어려워요.

합일의 모성, 이건 쉬워요.

내 자식 늘 품안에 안고 살며 그 자식이 최고인거야~~

요즘 아이들 그렇게 키우지요?


성모님은 하느님 영광 가릴까봐~~

눈물 흘리지 않으셨지요!

 

눈물 때문에 예수님을 못 본 사람은 누구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 뒤에 서 계셨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우느라고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의 대부분은 자기의 恨 때문이거나 자기상실감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세상을 떠나면 축복받을 일이지요.

하느님 곁에 가니 기뻐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했기에~~

허전한 가슴을 메울 길이 없어 빈 무덤만 바라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십자가의 길 하실 때 마음이 아파요? 안 아파요?

예수님께서 얼마나 고통을 받으셨는지 느낌이 와 닿으시나요?


다이제스트에 발표된 예수님의 고통에 관한 논문을 의사들의 입장에서 분석하여 발표한 것을 보면 예수님의 고통은 이미 ‘육의 고통’이 겟쎄마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성서에 보면 겟쎄마니에서 피땀을 흘리시는 것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혈한증이라고 하는 데 극도의 공포심이 들면 모세혈관이 터지면서 땀과 피가 함께 흐르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피눈물도 가능합니다.

너무 울면 눈물샘에 상처가 나서 피가 눈물과 함께 흐르는 거지요.

저는 교도소사목을 하면서 사형수들이 사형되기 직전에 런닝 샤쓰 밖으로 벌겋게 배어나오는 피땀을 보았습니다.

겟쎄마니에서 피땀은 정말 흘리신 겁니다.

제일 먼저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기 전에 기둥에 묶고 태형을 하지요.

그 채찍의 가죽 끝은 수십 개로 갈갈이 찢어져 있고 그 끝에는 사금파리나 양의 뼈를 달아 놓았기에 그 채찍을 잡아당길 때마다 그것들이 살에 박혔다가 잡아당기면 살점이 떨어져 나옵니다.

예수님의 사인은 태형을 맞아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 크기에 미리 충격을 주는 황제의 자비입니다.

피가 흘러내리는 그 몸에 양쪽 목 사이에 횡목만 끼고 가는 데 그 무게가 45~60킬로가 됩니다.

이미 예수님은 쇼크상태인 몸으로 끌려가는 데 안 넘어질래야 안 넘어질 재간이 없으시지요.

골고타 언덕에는 미리 놓아 둔 길다란 나무가 땅에 있고, 그 곳에 사람을 눕히고 십자가를 만든 다음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 정중신경이 흐르는 곳과 두 번째 발가락과 세 번째 발가락 사이에 지름 1센티, 길이 18센티미터의 끝이 뾰족한 철대못을 박습니다.

이 아픔은 톱으로 생손을 써는 고통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우지요.

십자가를 바로 세우면 사람의 체중이 내려 앉아 폐가 눌립니다.

그럼 숨을 들이쉴 수는 있는데 내쉴 수가 없어 이산화탄소가 축적되며, 숨을 쉬려고 엉덩이를 들어 올리면 가슴이 눌리지요.

성서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 6시간 동안 사경을 헤매신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의사들이 얘기하는 예수님의 사인은 호흡곤란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과다 축적 및 질식사입니다.

그 거친 나무에 등이 긁히며 손이 움직일 때마다 신경을 건드렸을 것입니다.

6시간 동안 예수님은 온 몸의 피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그래도 바로 죽지 않았다고 옆구리를 창으로 쑤셨지요!

로마법에는 빨리 죽게 하기 위해 쑤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창을 몸속에 쑥 집어넣은 다음 그 창을 배배 돌려서 창자가 끊어지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살아오면서 많은 고통을 받으셨겠지만~~

예수님처럼 이런 고통은 받지 않으셨을 겁니다.


저도 아시는 분은 알지만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입니다.

그러나 한번도 나 낫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소화데레사는 모든 것을 다 양보해도 고통만큼은 남에게 양보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고통을 사랑하려고 하는 그것이 예수님과 일치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구멍이 나면 세상의 바다에 빠집니다.

우리의 손과 발에 뚫어진 구멍에 못이 박혀 있지 않으면~~

주님의 못이 박혀 있지 않으면~~

그 곳으로 바람이 숭숭 통하여 무너집니다.

비록 지금 힘이 들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가야합니다.


사순절이 되면 미워 죽겠는 놈이 더 나타나지요!

그런데 먼 데도 아니라 코앞에 있는 사람이

가장 나를 격려해 주어야 할 사람이~~ 가장 상처를 주지요.

그 사람 끌어안는 것이 십자가 끌어안는 것입니다.

 

사순절 내내 엉터리로 살았다 하더라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사순절 내내 아무것도 하지 못했더라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이번 성주간 동안 며칠 남지 않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처럼 ~~

남은 기간 동안 깨어 산다면 우리도 부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의 하느님이 아니라 현재의 하느님이십니다.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부활하셔서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해마다 부활은 돌아오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누가 부활시키나요?

내가요!(이사악의 목소리)

봐요! 저런 애들도 부활한다고 하잖아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알렐루야! 가 될 수 있도록~~

입에서만 겉도는 것이 아니라~~

“저, 오늘 부활합니다!”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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