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루가 24,36-4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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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1-04-28 | 조회수485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2011년 4월 28일 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말씀의 초대 베드로의 설교는 힘이 있다.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생명의 영도자를 죽인 백성들에게 무지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시어 백성들을 악에서 돌아서게 하시고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전한다(제1독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신다. 단순히 환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육신까지 부활하시어 우리 삶 한가운데 오셨다(복음).
***묵상방*** 부활은 지식이 아닙니다. 부활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애정입니다. 사랑과 애정을 어떻게 이론으로 증명할 수 있을는지요? 한계에 부딪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스승님께서는 자꾸만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한계를 깨뜨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왜 놀라느냐? ……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안타까움이 담긴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제자들은 부활하신 스승을 보자 유령으로 착각합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건 좀 심한 일입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반영억라파엘신부*+
사람들로부터 미처 생각하지 않은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당황 되기도 하지만 개인의 생각을 전제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부의 얘기이기 때문에 사적인 얘기로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모르면 모른다고 답하고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은 기대를 채워줄 수 없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섣불리 아는 척 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한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 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서 “보아라,” “만져 보아라.” 고 하셨습니다. 혹 눈으로 환상을 본 것 같으면 직접 만져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믿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드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음식을 잡수신 것을 보면 부활한 몸이 실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닙니다. 나타나셨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시고 하는 것을 보면 모든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오고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눈을 열어 주셔야 그분을 알아볼 수가 있는 법입니다.
주님을 알아 뵈려면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맙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야겠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 결국 유령으로 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주셨습니다. 옛날의 허물을 들추어낼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좁은 분도 아니셨고 그저 믿음을 키워주지 못한 것이 안쓰러울 뿐이었습니다.
저 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흉보며 험담한 사람인데...하며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주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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