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사제가 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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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지요하 | 작성일2011-04-28 | 조회수628 | 추천수9 | 반대(0) 신고 |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사제가 가는 길
문정현 신부의 ‘서각전시회’에 다녀와서 오랜 세월 빚을 진 느낌 20대부터 ‘문정현’이란 이름은 내 가슴에 화인처럼 각인되어 있었다.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부터 문정현 신부님은 내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는 외경(畏敬)이기도 했다. 나는 젖먹이 시절에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로, 천주교 사제 중 문정현 신부님 같은 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늘 자부심을 가져왔다. 1970년대의 반독재투쟁, 1980년대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1990년대의 통일운동, 그리고 오늘의 환경운동과 정의구현운동에 이르기까지 나는 늘 문정현 신부님 편이었다. 2008년 이전까지는 한 번 뵌 적도 없고 행동전선에 함께 한 적도 없지만 마음으로는 변함없이 늘 문정현 신부님 곁에 있었던 셈이다. 문정현 신부님을 직접 뵌 적이 없다는 사실은 내게 알게 모르게 죄의식을 갖게 했던 것 같다. 마음으로는 늘 문 신부님을 지지하고 존경하면서도, 문정현이라는 이름이 내 가슴에 처음 각인된 때로부터 어언 30여 년이 흐르도록 한 번도 뵌 적이 없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빚을 진 기분마저 갖게 하는 것이었다. ▲ 문정현 신부님을 처음 뵌 날 / 2008년 10월 25일 오전, 충남 논산시 상월면의 한 길처에서 우리 가족 모두 문정현 신부님을 처음 뵙고 인사를 드렸다. 문규현 신부님과 수경 스님이 1차 오체투지 순례기도를 마치기 하루 전 날이었다. 정범구 현 민주당 국회의원, 경기도 안성 유무상통마을 방구들장 신부, 류상태 목사와 함께. ⓒ 지요하 - 오체투지 순례기도 2008년 10월 25일, 드디어 문 신부님을 처음으로 뵙게 되었다. 충남 논산시 상월면의 한 길처에서였다. 문규현 신부님과 수경 스님이 이명박의 4대강 파괴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벌이는 오체투지 순례기도에 처음 동참하던 날이었다. 2008년 9월 4일 지리산 노고단을 출발한 <사람·생명·평화를 위한 오체투지 순례단>은 1차 순례 목적지인 계룡산 중악단 근처인 논산시 상월면을 지났다. 태안 앞바다를 뒤덮었던 검은 재앙과의 싸움에 너무 몰두했던 탓에 병을 얻어 2008년 5월부터 6월까지 44일 동안 병상 생활을 했던 나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아내와 대학생 딸, 고3인 아들과 함께 오체투지 순례기도에 기꺼이 참여했다. 거기에서 문정현 신부님을 뵐 수 있었다. 오체투지 순례단 조끼를 입은 문 신부님은 양쪽 무릎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쌍지팡이를 겨드랑이에 끼운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문 신부님이 1975년 인혁당 사건 관련자 사형집행 저지 싸움에서 무릎을 다쳐 5급 장애를 얻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분이 무릎보호대를 착용하고 쌍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는 모습에서 뭔가를 직감할 수 있었다. 직접 오체투지는 하지 못해도 계속해서 순례단의 뒤를 따른다는 것을. ▲ 문정현 신부님과 함께 / 2011년 4월 25일 오후 서울 정동 갤러리 품에서 문정현 신부님과 처음으로 단둘이 사진을 찍었다. ⓒ 지요하 - 문정현 신부 나는 문정현 신부님을 처음 뵙는 순간 모자를 벗고 90도로 허리 굽혀 절을 올렸다. 오랜 세월 존경하고 지지해왔던 문정현 신부님을 처음 뵙는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감격을 표현하는 일에는 아내가 더욱 적극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도 컸다. 신부님의 이름이 각인된 날로부터 무려 30여 년이 흐른 후에야 처음 뵙는다는 사실이 면구스러움을 갖게 했다. 또 신부님의 거처라든가, 신부님이 주역인 자리를 찾아가서 뵙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어쩌면 신부님을 ‘여벌’로 뵙는 셈이라는 생각마저 들어서 여간 죄송스러운 게 아니었다. 일체감을 나누는 기쁨 그후로도 여러 번 오체투지 순례기도 현장에서 문 신부님을 뵐 수 있었다. 그러며 언젠가는 문 신부님의 거처라든가, 신부님이 ‘주역’이신 자리에 가서 뵙고 싶다는 생각,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다. 2009년에는 문정현 신부님을 좀 더 자주 뵐 수 있었다. 나는 여러 번 ‘용산 미사’에 참례했는데, 매번 그 참혹한 눈물의 현장에서 문 신부님을 뵙곤 했다. 문 신부님은 매번 그 미사에 참례했고, 그 현장은 문 신부님의 임시 거처였다. 역사에 길이 남을 용산 미사는 문정현 신부님의 현장 행동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용산 미사에서 접한 특이한 것 한 가지는 문정현 신부님 특유의 ‘평화 인사’였다. 천주교 미사전례 중에는 영성체 직전에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예절이 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사제의 인사에 신자 모두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화답하면 사제는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라고 권한다. 신자들은 일제히 “평화를 빕니다”라는 말로 전후좌우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악수도 한다. 또 제대 주변의 사제들도 서로 악수나 포옹을 나눈 다음 주례 사제와 일부 사제들은 신자들에게로 와서 인사를 나눈다. 문정현 신부님은 매번 신자들 속으로 들어와서 가장 오래 수많은 신자와 악수, 인사를 한다. ▲ 거리 미사 / 문정현 신부는 서각 작품 전시회를 마치고 저녁식사도 거른 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으로 이동하여 제21차 <월요 시국기도회(거리 미사)>에 참례하며 영성체 후에 253일 동안의 명동성당 생활을 접는 소회를 발표했다. ⓒ 지요하 - 문정현 신부 이어 문 신부님은 제대로 돌아가 마이크 앞에 서서 두 손을 머리에 올려 하트 모양을 만들기도 하고, 양손으로 V자를 만들어 보이기도 하며 “평화를 빕니다”라고 외친다. 신자들은 모두 같은 동작을 하며 “평화를 빕니다”라고 화답한다. 문 신부님은 그 말을 세 번 하는데, 점점 톤이 올라가서 세 번째는 고성이 된다. 신자들도 따라서 고성을 지르게 되는데, 세 번의 복창을 마친 신자들은 하나같이 손뼉을 치고 웃기도 하며 즐거워한다. 미사를 생동감 넘치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문정현 신부님의 고성 인사는 노(老) 사제의 젊음과 기백의 표현 같기도 하고, 신자들에게 깊은 신뢰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슬픔과 비장함이 담긴 미사, 눈물과 애절함이 주조를 이루는 미사임에도 신자들이 부분적으로는 웃기도 하며 즐겁게 참례할 수 있다는 것은 미사는 본질적으로 ‘잔치’임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할 법하다. 문정현 신부님의 ‘평화의 인사’는 2010년 가을부터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매주 월요일 저녁 계속되고 있는 천주교 <시국기도회-거리 미사>에서도 재현되곤 한다. 한 번은 사회를 보는 김인국 신부님(청주교구 금천성당 주임)이 대신하고서는 “이상은 짝퉁이었습니다”라는 말을 해서 신자들 모두 폭소를 터뜨린 적도 있다. 매주 월요일 오후, 만사를 제치고 서울 여의도에서 거리 미사에 참석하곤 하는 나는 문정현 신부님을 뵐 때마다 허리 굽혀 인사를 드린다. 여의도 거리 미사 때마다 문정현 신부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이 기쁘고 고맙다. 문정현 신부님을 비롯한 수많은 신부님, 매번 고정적으로 나오시는 이들을 포함한 수많은 형제자매와 함께 나누는 일체감은 참으로 각별하고도 살갑다. 조금이나마 도리를 한 느낌 문정현 신부님이 2010년 8월 10일부터 명동성당에 들어가 시위 성격을 지닌 기도생활을 계속하시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2010년 여름 4대강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사제들의 단식기도 때 서울대교구 관리국이 ‘영업방해’라며 가톨릭회관 앞 주차장에 설치한 천막을 강제 철거한 일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실도 알고 있었다. 문정현 신부님은 “미사를 하려면 로만 칼라를 벗고 하라”던 교구청 관리국 직원들의 목소리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영업방해라는 말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 같은 느낌으로 아프게 가슴을 파고들어서 권력의 우상이 되어가는 명동성당을 자신의 십자가로 삼아 고행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털어놨다. ▲ 서각 작품들 / 문정현 신부님이 서울 정동 갤러리 품에서 처음으로 서각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나도 한 점(사진 맨 위 작품)을 구매했다. ⓒ 지요하 - 문정현 신부 처음에는 40일 고행을 생각했는데, 자신에 대한 유형무형의 압박이 심해져서 문정현 신부님의 명동성당 고행은 253일이나 계속되었다. ‘정치 사제 물러가라’는 팻말을 든 철부지 신자들의 1인시위도 접해야 했다. 갖가지 심적 고초들을 안을 수밖에 없는 특이한 생활 가운데서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신자들도 만나고, 매일 ‘서각기도’도 하고, 사순절에는 사순 특강도 하고, 매일 ‘십자가의 길’ 기도도 했다. 문정현 신부님이 명동성당 구내 한구석에서 매일같이 오전에는 서각 작품을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253일이 지나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명동성당을 찾지 못했다. 2010년 11월 29일부터는 매주 월요일 저녁 빠짐없이 여의도 거리 미사에 참례하면서도, 하루만이라도 좀 더 일찍 가서 명동성당을 들렀다가 여의도로 가자는 생각까지는 하면서도, 실행하지를 못했다. 역시 문 신부님께 죄를 짓는 심정이었다. 그런 심정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한 번은 여의도를 갈 때 서산의 이름난 집에서 꽃게장을 한 상자 사 가지고 가서 미사 후에 드렸지만, 죄송한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문정현 신부님이 253일 만에 명동성당 생활을 접고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앞 <갤러리 품>에서 서각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253일 동안 한 번도 명동성당을 찾지 못한 데서 오는 자괴감 가운데서도 서각전시회 마지막 날인 2011년 4월 25일 오후에는 갤러리 품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모종의 기대와 위안을 가져다주는 것 같았다. 뭔가가 조금은 상쇄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 문정현 신부님의 오른편에서 / 2011년 4월 25일 서각 작품 전시회장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나는 문정현 신부님의 오른편 바로 옆 자리에 앉았다. ⓒ 지요하 - 문정현 신부 그러나 부활대축일을 지낸 뒤 25일, 나는 아침부터 마음이 뒤숭숭했다. 올해 연세 88세이신 모친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틀 전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모친이 거실 청소를 한다고 넓은 거실과 주방 바닥을 걸레질한 탓이었다. 몸살기가 생긴 모친은 부활 대축일에 성당에도 가지 못하고 자리보전을 했다. 그런 어머니를 두고 내가 집을 비울 수는 없었다. 2년 전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모친을 식이요법으로 살려내고, 골반으로 전이된 암세포가 확장되면서 엉덩이뼈가 골절되어 일어서지도 못하고 8개월 동안 병상 생활을 한 모친을 대체의학으로 마침내 걷게 해 주변에서 “효자” 소리를 듣는 처지였다. 서울 가는 일을 거의 포기하고 있을 때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근무하고 있는 학교의 총동창회에서 마련한 저녁 회식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으며 어머니 사정을 말하고 2시간 일찍 퇴근하기로 했으니 오후에 서둘러 서울을 가라는 얘기였다. 아내 역시 문정현 신부님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나는 모친의 허락을 얻고 오후 2시쯤 출발할 수 있었다. 명동성당 253일 고행의 결정(結晶)들 갤러리 품 3층 전시실로 들어가서 문정현 신부님을 뵙고 서산에서 사 가지고 간 꽃게장 한 상자를 드린 다음 전시된 서각작품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상당수의 작품 밑에 작고 동그란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빨간 딱지가 붙어 있지 않은 작품들 가운데서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베드로 1서 4-14”라는 글귀가 새겨진 작품을 선택했다. ‘길 위의 신부’라는 붉은 낙관이 선명했다. 값이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기꺼이 그 작품을 샀다. 나로서는 미술적 가치를 알 수도 없거니와 그것을 따질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작품의 미술적 가치 때문에 내가 문정현 신부님의 서각작품을 구매한 것은 아니다. ‘길 위의 신부’라는 문정현 신부님의 별칭이 낙관으로 새겨진 작품, 즉 문정현 신부님의 기도하는 손으로 만들어진 서각이기 때문이다. 또 명동성당 253일 고행 가운데서 태어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정현 신부님이 253일이나 명동성당에 머무르는 동안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내 무심을 조금이나마 상쇄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결심한 일이었다. 오랜 세월 문정현 신부님이 갖가지 고행을 계속하시는 그 수많은 현장을 한 번도 찾지 못하고 후원금 한 번 보낸 적 없는 내가 아닌가. ▲ 문정현 신부님의 노래 / 서각 전시회를 마무리하는 간담회 자리에서 문정현 신부는 애창곡 <부용산>을 불렀다. 박기동 작사, 안성현 작곡의 <부용산>(1948)은 감옥살이를 하던 장기수들을 통해 세간에 알려졌다. ⓒ 지요하 - 노래 '부용산' 문정현 신부님의 전시회에 출품된 서각작품을 한 점 구매했다는 자부심 같은 것을 챙기며 나는 서각작품들을 두루 살펴보았다. 예전에 서각 그룹전을 두어 번 보기는 했지만 개인전은 처음이었다. 개인전인 만큼 '집중과 포괄'의 조화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53일 동안 부자들의 교회인 명동성당에서 고행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메시지들을 일목요연하면서도 광범위하게 표출해낸 서각작품의 내용은 천주교 사제 문정현의 정신이자 삶 자체였다. 절규이자 광야의 소리였다. 그의 목표이자 존재 이유였다. 또한 그의 등불이자 길잡이였다. 2011년의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분별과 통찰과 예언의 집약이기도 하기에, 서각작품들에 내재한 작의, 그 정신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고귀하다. 귀중한 작품 한 점을 구매하여 보유하게 되었으니 나 또한 값진 사람일 수 있다. 오후 5시부터 시작된 간담회에서는 문정현 신부님의 오른편 바로 옆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253일 동안 줄곧 명동성당에서 문정현 신부님과 함께 했던 분들의 얘기도 듣고, 문 신부님의 회고와 노래도 들었다. ▲ 시낭송과 노래 / 문정현 신부님의 서각 작품 전시회를 마무리하는 간담회에서 나는 순서에 없는 시낭송과 축가를 자청했다. ⓒ 지요하 - 문정현 신부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자청하여 조지훈의 <낙화>라는 시를 낭송으로 헌정하고, 가곡 <옛 동산에 올라>를 개사한 <옛 강변에 올라>라는 노래도 불렀다. 문정현 신부님의 애창곡인 <부용산>이라는 노래를 듣고 울컥해 순서에 없던 일을 자청한 것이었다. 오후 6시 30분쯤 갤러리 품을 나와 여의도 ‘거리 미사’ 장소로 이동하면서 ‘길 위의 신부’가 가는 길은 예수님이 가신 길'이라는 생각을 다시 했다. 그 고난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일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 길은 진리와 정의의 길, 생명과 자유와 평화의 길일 수 있다. ‘길 위의 신부’는 내일도 또 내일도 예수님을 따르고 향해 가는 고난의 여정을 계속할 것이다. 11.04.28 11:11 ㅣ최종 업데이트 11.04.28 11:11 지요하 (sim-o) 태그/ 문정현 신부, 명동성당, 서각전시회, 길 위의 신부 출처 : '길 위의 신부' 문정현이 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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