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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팔일 축제 - ‘아, 오늘 내가 부활하는구나![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04-30 조회수485 추천수6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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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마루가 있는 성당이 좋은 게 뭡니까?

아무데나 앉을 수 있다는 거지요.

이 성당에 의자가 들어온 지는 30여년 밖에 안 됩니다.

그 전에는 성당의 이 마루바닥에 앉아서 미사를 드렸고 예전에는 성당 한 가운데 휘장이 쳐져 있었지요.

왜 휘장이 쳐 있었을까요?

남녀 칠세 부동석

저 쪽은 여자들이 앉는 자리, 하얀 천 이 쪽은 남자들이 앉는 자리 

지금도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감곡성당은 부부가 같이 오더라도 같이 앉는 법이 없습니다.

부인은 저 쪽으로 가고 남자는 이쪽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이 풍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도 그 자리에 그냥 앉으시면 됩니다. 닦았으니까 더럽지는 않을 겁니다.

날이 춥지도 않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교중미사 중에 40%정도는 순례객으로 알고 있습니다.

 순례 오셔서 이렇게 교중미사에 참례하면 주일복음 해설은 듣고 갈 수 있어도

 이곳의 영성에 대해서는 들으실 수가 없습니다.


이곳에 순례 와서 이곳의 영성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서는 사실은 오래된 성당에서 미사 드리고

경치 좋은 데 한 번 둘러보는 소풍으로 전락합니다.

오늘 순례자들을 이곳에 불렀을 때는 성모님의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분명히 불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성지에 발을 들여놓은 그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순례자들이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은

‘내가 내 발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성모님이 특별히 나를 불러주신 것이다! ’

부르심에 대한 신비를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성지를 우리는 거룩한 땅이라고 부르지요.

거룩한 땅은 사실 아무나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선택받은 자, 그리고 성모님을 통해서 특별히 성모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자들이

이곳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순례지에 오신 분들은 어쩌다가 친구 따라 오신 분들도 있고

이곳에 올 때까지 어디 가는지 모르고 찾아오는 분도 있을 겁니다.

많은 준비를 하고 기도 중에 찾아오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유야 어떻든 간에 성모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시려고 얼마나 많은 기도와 정성을 드렸다는 것을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그러나 순례미사 중에 이곳의 영성을 듣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마음으로 순례를 하시면

합당한 은혜가 내려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미사를 드리시고 2시 미사에 참석하면 그때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왕 온 김에 이곳의 영성을 한 번 들어보자!’


오늘 우리들은 부활 2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보는 양극단의 흐름이 있습니다.

첫 번째,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은 주님 부활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부활의 현세적인 의미만을 목청껏 외치는 외치고 있습니다.


반대로 근본주의자들이 있는데 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주님의 부활의 역사성만을 인정하다보니 부활의 현세적인 의미를 자칫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자유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 극단에 치우쳤기 때문에

우리 신앙인들은 복음주의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균형감각을 가지고 신앙의 실제성을 믿으면서 동시에 부활의 메시지를 받아들여서

구체적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복음주의자들입니다.

복음주의적인 의미에 있어서 부활의 신비를 찾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서

내 자신의 신앙의 주소를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는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후에 그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가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났던 이 사람들이 바로 오늘날의 나, 우리들의 모습일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마리아는 회개한 여인이었으나  그 밑바닥에는 깊은 슬픔이 깔려 있었습니다.

한평생을 몸을 팔아서 살아온 죄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나

그 슬픔은 한 순간에 고무지우개 지우듯이 지워질 수 없었기에 

 막달라 마리아는 눈물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성모마리아를 옆에서 지켰으며

십자가 밑에서 끝까지 예수님을 지켰고 무덤 주위를 떠나지 않았고

눈물로 예수님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습니다.

비록 그 여인은 예수님의 완전한 부활을 그 당시에 믿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님은 마리아에게 성스러운 모습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열심히 살고, 충성을 다하고, 그리고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자에게는

예수님은 늘 당신의 모습을 우선적으로 보여주신다고 하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살아가다가 우리는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흘리는 눈물의 대부분은 자기 위주의 한풀이로 흘릴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의 눈물도 역시 복음적으로 흘려야 하지 않을까!


두 번째, 예수님은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씩이나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면서 용기를 북돋우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는 온갖 두려움에 있습니다.

본인 자신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도 있고, 주변에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병원에 가면 중환자실에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가도 많은 환자들이 죽음에 직면하고 삽니다.

담담해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다못해 우리들은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그 검사의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에

깊은 공포와 두려움에 쌓일 때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우리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면서 오늘도 말씀으로써, 성체로써 우리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이 세상이 주는 평화보다는 영적인 평화를 우리들은 늘 갈망하고 갈구해야 될 겁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토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네 손을 넣어서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 되어라!”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면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고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진복자니라!’


도마는 의심과 회의와 분심의 대표자입니다.

모든 분열과 깨짐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부부사이도 의처증과 의부증 때문에 금이 갑니다.

본당신부와 신자들 사이도 서로 의심을 하면 그 공동체는 분열이 됩니다.


오늘도 부활한 주님은 의심과 불신과  회의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자에게

‘서로 믿고 신뢰하라!’

‘나를 믿는 자 되라!’ 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격려하십니다.

사람을 가슴 속에 담고 살지 말고 나를 가슴에 담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믿는 존재가 아니라 신뢰하려고 애쓰는 자입니다.

믿을 분은 하느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믿고 살지 마십시오.

충성을 다하던 자가 한순간에 나에게 칼을 들이댑니다.

사람을 가슴팍 속에 담고 사는 사람은 한평생 죽을때까지 상처로부터 헤어나지 못합니다.

미운 놈 피해서 달아나면 더욱 미운 놈이 내 앞에 나타납니다.

그 놈 피해서 도망치면 더더욱 미운 놈이 내 앞에 나타납니다.

어떻게 한평생을 사람을 피하면서, 내 입맛에 맞는 사람만 골라가며 살아가겠는가!


내 가슴팍 한가운데 예수님을 담고 살면 어떤 놈이 와서 찔러도 담대해집니다.

물론 예수님이 한 가슴 속에  있어도 누가 와서 찌르면 아픕니다.

그러나 그전과는 무엇이 달라졌느냐?

회복이 빠릅니다.

그 전에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로부터 피가 흘러내리지만 예수님을 한가운데 담고

살았을 때는 누군가 상처를 주어도 그전보다 회복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지고 담대해집니다.

나를 믿는 자 되고 나를 너희의 가슴팍 한가운데 모시고 살라!

오늘 우리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성서를 풀이해주시고 빵을 축성해 주십니다.

그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자마자 낙담하고 절망해서 먹고 살 길을 찾아 낙향하고 있었던 겁니다.


주님 때문에 핍박받다가 보면 절망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가난하다고 못 배웠다고 못 생겼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낙심하면서 숙명론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달라집니다.

갈 때는 절망의 엠마오 길이었지만 올 때는 희망의 길이 되어 단숨에 이스라엘로 줄달음 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부활신앙을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다섯 번째로 예수님은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대면하십니다.

주님을 잃고 고기 잡았던 옛 생활로 되돌아간 제자들,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해 기진맥진한 제자들에게 요깃거리를 제공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한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어린 양을 잘 돌보아라!’

예수님은 똑같은 말을 세 번이나 부르십니다.

왜 세 번이나 베드로를 부르셨을까요?

한마디로 영적인 명예회복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한 전과자입니다.

그래서 늘 부끄러움과 수치심땨문에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맏형 노릇을 못했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서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세 번 묻고 대답을 들으면서 영적인 명예회복을 주시고 다시 사도직을 맡겼던 것입니다.


참으로 간단하게 주님을 만났던 다섯 분의 이야기를 잠깐 소개드렸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슬픔과 눈물에서 해방시켜주셨고

다락방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공포와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의심하는 도마에게 나타나서 의심과 불신과 회의로부터 해방시켜 주셨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낙담과 절망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고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수치심과 부끄러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한 의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해방과 자유를 뜻합니다.

오늘 묵상한 어둠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시기를 간절히 기원하셔야 됩니다.

주님은 분명히 부활하셨고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자신들이 부활하는 겁니다.


장엄하게 부활미사를 드리는 사제이지만 저는 매일매일이 수난시기입니다.

매일 매일 수많은 순례자들을 만나고 면담하고 목이 쉬도록 떠듭니다.

저녁때 침대에 가서야 ‘아, 오늘 내가 이제 부활하는구나!’

이 김신부에게 있어서 사순절은 매일매일입니다.


매일같이 저녁마다 부활하고 매일같이 다가오는 부활절을 다시 마음을 다져보면서

‘내일 만나는 순례객들에게 죽을힘을 다해서 사제로서 말씀을 전하자!’


예수님의 부활은 매일매일, 24시간, 일년 열두달이 사순절이요,

그 사순절을 희망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매일매일이 부활입니다.

주님께서는 약한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말씀으로 양육시켜주시고

성체를 통해서 축성해 주십니다.

거룩한 성지에 불러주셔서 치유와 구마와 믿음의 갑옷을 입혀서 내보내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초대받은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면서

정성을 다하여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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