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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팔일 축제 - 부활하셨습니까?[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04-30 조회수425 추천수4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부활대축일 -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찬미예수님

 

내가 과연 내일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을까!

이렇게 의심하면서 잠이 드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는 것 자체가 바로 기적이요, 부활입니다.

신문에 나지 않았을 뿐이지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한밤중에 죽는 사람이 수 백 명에 이릅니다.

 

여러분들, 오늘 부활하셨습니까?

네~

 

교회와 성당은 뭐가 다릅니까?

엄밀하게 따지면 성당이나 예배당은 눈에 보이는 건물입니다.

교회는 개신교에서만 쓰이는 용어가 아닙니다.

○○ 성당이 아니라 ○○ 천주교회라고 써있지요?

 

교회라고 하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그 내면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없어도 교회는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어느 선교사 신부님이 야자수 밑에서 미사를 드리더라도

신자들이 모여 있으면 그곳이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천주교회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첫 번째, 수난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교회입니까?

두 번째, 부활을 근거로 생긴 교회입니까?

 

초대그리스도교는 부활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시작이 된 교회입니다.

부활했느냐, 부활하지 않았느냐~ 그 차이입니다.

‘천주교회는 부활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교회이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부활에 대한 책임을 계승시킨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공동체는 본당공동체이든, 액션 공동체이든, 가정공동체이든

자기 몸 하나이든......성화가 되어 살아 있습니다.

 

부활공동체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말씀으로 사는 공동체입니다.

두 번째는 성사생활로 사는 공동체입니다.

세 번째는 봉사로 사는 공동체입니다.

네 번째는 애덕으로 사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수난공동체가 아니라 부활 때문에 생긴 공동체입니다.

 

저는 청주교구 소속이지만 전국구이고, 전 세계를 다니고 있습니다.

최양업신부님이 일 년에 걸어서 칠천리라고 하지만, 저는 칠천리만 다니겠습니까?

나만큼 돌아다니는 신부도 드물 거예요.

 

오만 성당을 돌아다니다 보니까 교구나 성당의 흐름을 알고 있습니다.

다녀보면 부활하는 교구가 있고, 죽은 교구가 있습니다.

어느 교구는 신종플루가 돌때, 본당에 있는 성수대부터 치우라고 했답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성수가 뭐예요.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성한 마귀를 쫒는 거룩한 물인데

신종플루 걸려도 성수 찍으면 낳는다고 가르쳐야 되는 것 아닙니까?

 

비록 가난하고 헌금이 작게 나와도

‘이 교구는 살아 있는 교구구나!’

그렇게 느껴지는 정말 살아있는 초대교회 모습의 교구가 있습니다.

 

부활한 모습의 성당이 있고 죽은 성당이 있습니다.

제가 수많은 성당을 다니지만 글쎄요~

이 성당은 정말 살아있구나! 느낀 교구는 5%나 될까?

 

여기 외국 교포들이 앉아 있지만 외국교회도 조용한 동네가 하나도 없어요.

지극히 세속적인 것이 교회 안에 들어 와서 감투싸움하고

본당 신부 맘에 안 든다고 투서하고.....

기도는 안 하고 헐뜯고 자기싸움만 하고 앉아 있지요.

 

성지도 살아 있는 성지가 있고 죽어 있는 성지가 있어요.

그건 순례자들이 제일 먼저 느낄 거예요.

‘아, 이 성지는 살아 있구나!’

 

부활한 모습의 수도원이 있고 죽어 있는 수도원이 있어요.

외국에도 보면 죽은 수도회가 참 많지요.

공의회 이후에 사복수녀원이 늘어났어요.

수도복 벗어버리고 세상과 가까워진다고 사복하고~

그런 수도원은 다 망했지요.

 

부활한 모습의 공소가 있고 죽은 공소가 있어요.

무당만 드글드글대는 동네에 선교사가 들어가서 복음의 씨앗을 뿌려

무당촌이 10년 안에 천주교회 공동체가 되었어요.

죽은 구역반이 있고 살아있는 구역반이 있어요.

 

눈 뜨고 숨 쉰다고 해서 다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부활했다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귀하고 비싼 존재일수록 썩을 때 냄새가 더럽고 역해요.

동태 한 마리 썩을 때와 송장이 썩을 때는 냄새가 더 납니다.

 

사제가 잘못 살았을 때 풍기는 냄새는 평신도가 잘못 살았을 때보다 더 더럽고

수녀들이 잘못 살았을 때 풍기는 냄새는

레지오단원이 잘못 살았을 때 풍기는 냄새보다 훨씬 더 더러워요.

성당 다니는 여러분들이 풍기는 냄새는 이방인들이 잘못 살았을 때보다 더 역해요.

귀한 존재가 망가지기 시작하면 그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하고

그 주변이 전부다 깊은 상처를 받아요.

 

여러분들은 세례 받는 그 순간부터 천주교 신자라고 하는 레테르가 붙어 다닙니다.

우리들이 부활절 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 영과 육이 부활을 체험하고 살아가는지~’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 20장 1절부터 10절까지 읽으셨지요.

오늘 등장하는 인물이 세 명입니다.

막달라마리아, 베드로, 요한

 

첫 번째, 막달라 마리아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사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뒤바꿔 놓는 것도 보면 색깔이 달라요.

첫 번째, 아주 나를 비참하게 쫄딱 망하게 한 사람

두 번째, 나를 새롭게 부활시킨 사람

 

막달라 마리아, 이 여인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루가 사가는 그녀로부터 일곱 마귀가 나갔다고 기록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지요.

 

사람들이 자기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할 때 몸으로 막았잖아요.

창녀였던 자기를 개심시키고 용서하셔서 정결하게 만드신 이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예수님께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랑뿐이었던 겁니다.

 

팔레스타인은 시체를 묻고 사흘 뒤에 사랑하는 자가 무덤을 방문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이른 새벽에 무덤에 와 보고 깜짝 놀랐지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두 가지 생각을 했어요.

첫 번째는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는 것만으로도 직성이 풀리지 않아

시체를 모독해서 다른 곳에 버렸구나!

 

두 번째는 무덤을 뒤져서 시체를 훔치는 도둑놈들이

우리 주님의 시체를 훔쳐갔구나!

막달라 마리아는 성내에 들어와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갑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 사도한테 이야기 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베드로 사도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고

그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아직 제자들에게 지도자였던 겁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뛰어갔다고 합니다.

요한은 젊어서 더 빨리 갔지만 베드로는 충동적인 성격으로 무덤으로 들어갑니다.

 

이 둘의 태도는 극명합니다.

성서에 보면 베드로는 ‘놀랄 뿐입니다.’

이것은 감성입니다.

 

요한은 믿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지성과 의지를 합친 것입니다.

신앙은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들어가 보니 머리 수건은 잘 접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는 그 경황이 없는 순간에도 머리 수건은 잘 접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뭡니까?

축복받은 뒤 흥분하지 마라!

축복 받은 자는 항상 뒤처리를 잘 해야 됩니다.

 

신앙은 감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머릿수건을 반듯하게 접어놓고 떠난 모습을 보고 요한은 믿었습니다.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여기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믿는 자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진심으로 믿는 자에게 당신 어머니를 맡기십니다.

 

처음에 무덤으로 갔던 자는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하고 있었던 마리아였습니다.

처음으로 부활을 믿은 자는 성모님을 맡길 만큼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이었던 겁니다.

 

사람은 못 배워도, 치매가 왔어도,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 그 뜻입니다.

왜?

마음의 눈으로 하느님을 보고 이해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위대한 해석자라고 합니다.

지성이 혼미할 때라도 사랑은 진리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연구로서 사물의 뜻을 파악할 수 없을 때에도 사랑은 사물의 뜻을 정확히 파악합니다.

청년 화가가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리고 나서 친구에게 비평을 부탁합니다.

“자네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구려!”

청년의 그림에는 테크닉은 있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전교를 하려면 예수님을 먼저 사랑해야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시선을 물리치고 무덤을 찾아갔고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 무덤을 찾아가서 놀랐지만 믿었습니다.

 

신앙은 믿는 겁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말로만 전해 들었을 들었을 뿐이지만 부활을 믿습니다.

여기 김웅열신부도 사제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때문입니다.

그분이 부활했으니 나도 부활할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살아가는 겁니다.

 

아니면 우리는 사이비집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수난 때문에 생겨난 공동체가 아니라 부활공동체라는 것을 믿고

육적인 부활만이 아니라 영의 부활을 겸손되이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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