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의 자비 주일(요한 20.19-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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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1-05-01 | 조회수37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2011년 5월 1일 일요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19-31)
말씀의 초대 사람들은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를 이룬다.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한마음으로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를 드린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이다(제1독서). 베드로 사도는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 영원한 구원의 선물을 주셨으니, 시련과 슬픔을 이겨 나가면 영혼의 구원을 얻으리라고 전한다(제2독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의심하고 있던 토마스에게도 나타나시어 몸소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신다. 제자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헤아리시고 배려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이다(복음).
토마스 사도는 스승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얻으려고 밖에 나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무서워 숨었지만, 토마스는 바깥소식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토마스가 돌아오자, 제자들은 그를 힐책합니다. ‘스승님께서 오셨더랬다.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없었습니다. 그는 밖에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무서워 숨어 있었지만 그는 개인적인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자신감에 찬 토마스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합니다. 못 믿겠다고 선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평화가 너희와 함께! -최인각신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서 부활 팔부 축제를 잘 지내셨으리라 믿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성큼 성큼 달려가야지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많은 허물과 잘못,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 큰 사랑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사랑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청주교구 신부님 중에 반 예문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1955년 한국에 오셔서 34년간을 한국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셔서 뉴욕의 메리놀 수도회 본부에 계십니다.
어머니께서 관절염으로 고생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미사곡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고 합니다. 아들이 검토해 보니 다른 것은 다 좋은데 퇴장 성가곡이 마음에 걸려서 어머니! “이 곡은 장례미사 때 부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노래는 ‘행진곡’이었습니다. 그 때 어머니께서는 “내가 일생 주님을 믿고 살아왔고 이제 주님께서 부르셔서 이세상을 떠나 주님 곁으로 가는데 어찌 지체할 수 있겠느냐! 성큼 성큼 달려가야지!”하셨답니다. 신부님은 어머니의 신앙에 놀라움을 갖게 되었고 장례미사 때에 트럼펫 연주자를 초청하여 장엄하게 행진곡을 연주해 드렸답니다.
제가 아는 세실리아 수녀님 어머님께서는 “가는 세월”을 부탁하셨습니다. 아십니까?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을 수가 있나요!……’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이 곡을 선택하셨겠습니까? 자식을 위해서 입니다. 장례미사에 함께하신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사실 세월이 흘러갑니다. 가는 세월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 지금 최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훗날 후회하지 말고…지금 잘 살아달라는 호소입니다.
제에게 세례를 주신 이한구 라우렌시오 신부님이 계셨는데 암 투병을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요양 중에 말씀 하셨습니다. “일생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강론을 하고 노력했지만 막상 내가 죽음에 직면하니 정작 내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임종을 몇분 앞두고 “데오 그라시아스” 하셨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유서를 보면 “그분이 나의 마지막을 결정하실 것입니다. 나는 죽음을 미리 받아들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마지막 여정에 은총을 주실 것을 희망합니다. 나의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나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실 것이라는 깊은 신앙과 함께 아무리 어렵고 힘든 고통이 따른다 해도 내 생애를 그분의 종으로 바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임종 직전에는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 하십시오. 울지 말고 우리 함께 기쁘게 기도합시다.” 하며 당신의 임종을 지키는 이들에게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 하십시오.” 하며 위로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무엇이냐? 바로 이런 것입니다. 육적으로는 고통 스럽고 힘들어도 주님께 대한 믿음과 약속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서 하느님을 차지하는 기쁨입니다. 오늘도 제가 병원에 봉성체를 다녀왔는데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휠체어에 의지하여 계시면서도 하느님 때문에 마음이 평화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옆에 계신 분이 “고통은 마음의 문을 열게 합니다.” 하시더라고요. 세상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롭다든지 환경이나 여건, 처지가 좋으면 평화롭다고 말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이런 평화를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분명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부활을 희망하고 산다고 말하는데 진정으로 그 부활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눈이 뜨이지 않은 까닭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같은 몸이면서도 달라서 믿음이 없이는 볼 수 없는 몸입니다. 초월적입니다. 그래서 문을 닫아걸고 있어도 거기에 들어오실 수 있는 몸입니다.
위기에 처한 제자들이 문을 닫아걸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오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 하셨어요. 자기의 스승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어요. 그래서 그 불똥이 자기들에게도 튈까 두려워 떨고 있는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신 겁니다.
이 평화는 사실 이미 예고 되었던 평화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가시면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14,27-30)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끊임없이 말씀하시지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설사 받아들인다 하면서도 그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가 없습니다. 그 말씀이 축복이 되지 못합니다. 분명 실천하면, 축복이 되는데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못에 찔린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주신 것은 그 십자가를 있게 한 세상을 이겼다는 말씀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 이미 말씀하신 것을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왜? 믿지 못하니까…
제자들은 마침내 주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이것도 이미 예언되었던 말씀입니다. “너희는 지금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 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16,22)
토마스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사랑과 우리의 소명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어찌 보면 솔직하기도 하지만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 누락되어 실망하고 완고한 고집을 부린 토마스입니다. 그에 대한 배려를 하신 주님입니다. 또한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선언 하심으로써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말씀만 듣고도 믿는 사람이 되어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토마스가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는 예수님 앞에서 감히 만질 생각을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믿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에게 있어 예수님께서는 이제 다른 사람의 하느님, 다른 사람들의 주님이 아니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이제 남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사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믿음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은 결코 내 믿음이 아닙니다. 내 아내, 남편, 자녀, 부모의 믿음의 정도가 다 다릅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을 부러워하기에 앞서 내 믿음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최선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이끄시니 만큼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평화를 누리고 영생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반예문 신부님의 “내가 살고 싶은 곳” 노래를 소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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