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은 부활2주일이면서 동시에 무슨 주일이라고 그러지요?
<하느님 자비주일>
성서에 나오는 이 자비는 현세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과거, 미래까지도 뜻하지요.
하느님의 자비는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바로 이 날 이 시간에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앞으로도 자비를 계속 베풀어주실 것을 믿는다는 그 뜻일 것입니다.
믿습니까?
생각해 보면 내가 내 손가락으로 묵주를 굴릴 수 있는 것만 해도 주님의 자비요,
내가 내 두 다리로 걸어서 성당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는 것만 해도 자비요,
내가 내 입으로 음식을 삼킬 수 있는 것만 해도 자비요,
기계에 의존하기 않고 내가 내 숨구멍으로 숨을 들이쉴 수 있는 것만 해도 자비입니다.
한밤중에 잠이 들어 내일 아침에 눈이 떠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따라서 아침에 눈이 떠지면 제일 먼저 첫 번째 입에서 나와야하는 기도는
‘주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하루하루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불감증,
즉 못 느끼고 살아가는 病 때문에...
지가 밥 세끼 꼬박꼬박 챙겨먹어서 잘사는 줄 알고 있고, 지가 운동 열심히 해가지고
손가락 발가락이 움직이는 줄 알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상상도 할 수 없이 크나큽니다.
‘주님! 주님이 언제 자비를 베푸셨습니까?
제 집구석 꼬라지 보면 제대로 되어있는 것 하나도 없고..
자식들은 다 냉담자고, 돈 때문에 맨날 찌들려 살고,
아이는 소년원을 들락거리고 교도소를 왔다 갔다 하는데....
이런 인생에도 주님의 자비가 개입되어있다는 말입니까?’
있지요.
아무리 모질게 산 인생이라 하더라도 뒤돌아보면
하느님께 감사할 것이 불평할 것보다 더 있을 겁니다.
오늘 우리들은 부활2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제일 큰 문제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난 겁니다.
대부분 부활을 다 믿고 있었지만 많은 크리스천 가운데서
‘그 몇 십 년 전에 열두 사도가 주님 봤다고 하는 것은 허깨비를 본 것이지...
돌아가신 분이 어떻게 다시 부활했겠어? ’
이래서 성서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30년이 지나서 쓰게 되었고...
따라서 각 복음서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부활은
혼의 부활이 아니라 육신부활이라고 하는 것을 군데군데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부활을 보는 양극단이 있습니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은 주님 부활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부활의 현대적인 의미만을 목청껏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 부활하고 안하고는 별 문제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새롭게 부활하면 됩니다.
주님 부활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반대로 ‘근본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주님 부활만을 역설하다보니까
부활의 현대적인 의미 의의를 소홀히 하고 있죠.
균형 감각이 있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복음주의자’ 라 그럽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영적으로 균형 감각이 있는 신앙인으로써
부활의 실제성을 믿으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 사는 다양한 현대인들에게 주는
부활의 메시지를 남이 아닌 바로 내가 어떻게 잘 씹어 삼켜서 행동으로 열매로 맺느냐!
이렇게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복음주의자들이라고 그럽니다.
복음주의적인 부활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써야 됩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을 통하여
내 자신의 신앙의 주소를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는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유는 예수님을 만났던 이 사람들이 바로 오늘날의 나일 수가 있고...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삶이 그 후에 어떻게 변화가 있었는가!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제일 먼저 누구에게 나타나십니까?
<막달라 마리아>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을까요?
여자들은 말을 다른 사람에게 잘 전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여자한테 한 번 터트리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온 도시에 퍼질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남자보다는 여자인 막달라 마리아한테 나타나서
‘가서 입 좀 놀려라.’
그런 의미가 있다고 하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그렇진 않겠죠?
첫 번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우리가 알다시피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였습니다.
거리의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만나고 나서 회개한 여인이었습니다.
열심과 충성으로 뛰어난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밑에서 끝까지 지켰고
성모님의 흔들거리는 몸을 막달라 마리아는 팔로 안아 부축해드렸던 여인이었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무덤주위를 단 한시도 떠나지 않으며
눈물로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했던 여인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완전한 부활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성스러운 모습을 제일 먼저 보이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열심과 충성을 다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신다고 하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세례를 받고 살면서도 요령을 피우는 자들, 하느님 앞에마저도 잔머리 굴리는 자들은
세상에서는 그럴듯하게 살아가고 그럴듯하게 인정을 받겠지마는
하늘에서는 인정을 못 받습니다.
신앙은 우직하게/ 열심하고/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순명할 때.....
예수님은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신다고 하는 것을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락방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말을 무려 몇 번이나 한 줄 압니까?
맞추는 분 상 드리겠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뭐 막 갖다 붙여.....^^
집에서 숙제로 해 오시길 바랍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부활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했던/ 이 세상에서 다시 사람들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은
‘평화’ 평화입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렇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 지금 마음에 평화가 있으십니까?
지금 내 마음 안에 평화가 없다고 하는 얘기는
하느님이 그만큼 들어와 계시지 않는다는 얘기겠죠?
오늘 우리들이 미사 드리는 이 시간에도 병원에 가보십시오.
죽음의 공포로 떨고 있는 중환자들이 있습니다.
암병동에 가보고 호스피스 병동에 가보면 죽을 날을 기다리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 온갖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러한 우리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위로해주십니다.
세 번째, 주님은 토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있을 때 주님 나타나셨지만 그 자리에 토마는 없었습니다.
알다시피 토마는 대단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떨고 있을 때 토마는 일거리를 찾으러 나갔을 겁니다.
앞으로 뭘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되느냐?
그러다 나중에 돌아와 보니까 다른 제자들의 얼굴이 사람얼굴이 아니야,
예수님 만난 사람의 얼굴이 어찌 정상이겠습니까?
훤한 달덩어리처럼 변해있고.... 뭔가 아무튼 범상치 않은 일을 당한 것 같아요.
제자들이 물었죠.
“어디 갔다 인제 왔어? 우리는 주님을 뵈었어.”
그때 토마가 뭐라 합니까?
‘하이구. 이거 세트로 미쳤구만.... 야, 죽은 양반이 어떻게 나타나냐?
내가 그 양반 못자국에다 이렇게 손가락 집어넣어서 배배 한번 돌려서 촉감이 오면
내 그때 믿을 겨!’ 충청도 말로 이렇게 했을 겁니다.
나중에 주님이 도마에게 나타나서
‘너 이놈아! 네 손을 내밀어서 내 옆구리를 찔러봐라.
그래서 믿음 없는 자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 되거라!’
토마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무릎을 털썩 꿇으며 나온 말이 뭡니까?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단 두 마디....‘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렇게 처절하게 참회하는 토마에게
‘토마야! 너를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진복자니라.’
토마는 의심과 회의와 불신의 대표자로 성서에 등장합니다.
모든 분열과 깨짐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의처증 의부증, 신자들이 사제를 못 믿고 사제가 신자들을 불신합니다.
마귀는 그런 방법으로 공동체를 깹니다.
가정을 깨고 한 사람의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지가 지 자신을 못 믿게 만듭니다.
늘 열등감.... 그런 것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도 부활한 주님은 의심과 불신과 회의의 깊은 수렁에 빠져있는 자에게
서로 믿고 신뢰하라고... 나를 믿는 자가 되라고 격려해주고 계십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성서를 풀이해주시고 빵을 축성해주셨죠?
그들은 주님 십자가에 못 박히시자 낙담하고 절망해서 낙향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핍박당하다 보면 우린 분명히 절망하고 낙심하고 내가 왜 예수 믿어서
이렇게 쌩고생하나? 차라리 막 살껄. 안 믿고.....’
낙담과 실망이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딸려있던 감정적인 마음이었습니다.
가난하다고/ 못생겼다고/ 못 배웠다고/ 가진 것이 없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거나 체념하면서 숙명론자로 전락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부활한 주님을 만나기만하면 달라집니다.
갈 때는 절망의 엠마오 길이었지만 올 때는 희망의 길이 되어서 단숨에 예루살렘을 향해
줄달음 칠 수 있는 것이 주님 체험이요, 말씀체험이요, 성체체험이요, 성령체험입니다.
다섯 번째, 주님은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대면하십니다.
주님을 잃고 다시 옛날 직업이었던 고기 잡는 옛 생활로 돌아갔던 베드로와 제자들....
그러나 예수님 안 계신 그 배에서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기진맥진한 그 제자들에게 배 오른쪽으로 그물을 쳐보라했을 때
백 쉰 세 마리가 되는 고기가 잡혔고... 그물이 터질 정도가 되었지만 터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구워주어서 제자들에게 먹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이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만났던 제자들은 넋을 잃습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한 것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을 묻습니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어린양들을 잘 돌봐라.’
연거푸 세 번을 물으시니까 베드로가 서운한 마음에
‘제가 주님 사랑한다는 거 아시면서 왜 자꾸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예수님은 왜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물으셨을까?
한마디로 명예회복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첫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배반한 전과자입니다.
그래서 늘 부끄러움과 수치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맏형 노릇을 못했다는 것 때문에 늘 괴로워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세 번 묻고/ 세 번 대답을 들으심으로서
영적인 명예회복을 시켜 주시며 다시 사도직을 만드신 겁니다.
부활한 주님은 이처럼 여러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첫 번째,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슬픔과 눈물에서 해방을 시켜줬습니다.
두 번째,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찾아가셔서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세 번째, 토마에게 나타나셔서 의심과 불신 회의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네 번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낙담과 절망으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다섯 번째,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수치심과 부끄러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부활은 우리들에게는 해방과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런 엄청난 주님의 자비를 입고서도 아직 우리 마음에 자유를 못 느끼고 있다면
늘 뭐에 끌려가는 삶/ 옥쇄에 매달려가는 삶으로 산다면.....
아직 우리는 부활한 것이 아닐 겁니다.
교우여러분들, 여러 가지 어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기원합니다.
매괴성모님의 전구와 거룩한 성체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빵을 떼어 받아먹을 때 눈이 열려서 주님을 알아봤듯이....
부활 주일미사 때 주님을 체험하고 성령을 체험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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