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 예수님, 사랑 - 송영진 모세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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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11-05-03 | 조회수588 | 추천수12 | 반대(0) 신고 |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2011. 5. 3. 화)(요한 14,6-14)
<하느님, 예수님, 사랑> 필립보 사도가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돌을 던지던 유대인들에게 하셨던 말씀과 거의 비슷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도, 적대자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나를 믿어라. 내가 하는 일은 곧 아버지 하느님의 일이다. 그 일을 보면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란 예수님의 전 생애를 가리킵니다. 즉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죽은 이를 살리고, 사람들을 가르친 일,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까지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생애 자체가 곧 예수님께서 하신 일인데, 예수님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요한의 첫째 편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요한 4,9).”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보내 주신 ‘사랑’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믿어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볼 수 있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1요한 4,15).”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안에 머무르다.’ 라는 말은 ‘일치, 결합’을 뜻합니다.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곧 구원을 받는 것이고, 하느님의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예수님이 일치되어 있으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은 곧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 됩니다. 또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은 곧 사랑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일치를 이룬다는 말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삶’과 ‘사람’과 ‘사랑’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사실상 같은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그대로 예수님이라는 분을 잘 나타내 줍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과 똑같은 ‘삶’을 사신 하느님의 ‘사랑’이신 분입니다. ‘사람’으로 사신 예수님의 ‘삶’은 곧 ‘사랑’이다, 라고 할 수도 있고,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으로 사신 예수님의 ‘삶’ 그 자체다, 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사랑 없는 삶은 사람의 삶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약육강식의 본능만 있는 짐승의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곧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필립보 사도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설명한 것이기도 합니다. 필립보 사도가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보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일은 곧 ‘사랑’이고,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는 예수님 말씀의 뜻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면 하느님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사랑’은 모든 의문과 질문들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나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지금 당장 너무 힘들어서 울고 있는 사람에게 이론만 길게 이야기한다고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론이 아니라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또 지금까지 말한 이론적인 설명은 몰라도 좋고, 잊어버려도 좋습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론으로 가톨릭 성가 469번 가사의 일부를 적습니다. “언제나 나는 물었다. 언제나 주께 물었다. 세상은 사랑 찾는데 왜 고통이 있냐고. ... (중략)... 사랑을 하면 알리라. 사랑하라 슬픔 가고 기쁨을 찾으리.” - 송영진 모세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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