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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길 위에 서다![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05-03 조회수534 추천수3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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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우리 감곡신자 여러분들, 그리고 순례지에 오신 순례자 신자 여러분들....

오늘 축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거룩한 미사에 나오기까지 두려움이 있었던 분도 계셨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사람사이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우리들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무수히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어떤 인간이 내 속을 다 뒤집어 놓을 때, 그래서 분노가 일어날 때...

그 분노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러나 분노가 내안에서 일어날 때,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화가 나면 날수록 더 차분해지고. 아주 냉정해지면서

사리분별을 잘해서 오히려 화낸 사람을 더 미안하게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화가 날 일도 아닌데 그저 자기를 화내게 했다고 해서

사건을 크게 만들고, 포악해지고, 난폭해지고, 말도 거칠어지고...

그래서 싸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게 바로 인격의 차이가 아닌가!’생각해 봅니다.


그 사람의 인성 안에 얼마나 영적인 균형 감각이 있느냐!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죠?

세례 받는다고 해서 개떡 같은 성격이 갑자기 성인군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세례 받고 난 다음에

내 이 못된 성격 고치려고 미사 때마다, 강론 들을 때마다, 피정할 때마다,

테이프 들을 때마다... 성격을 죽이려고 애쓰고 포기하려고 애쓰지만

그것이 고무지우개로 지우듯이 한순간에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더 큰 화를 입었는데도 

‘허허~~’거리면서 분노를 안 하는데

나는 저 사람이 당한 화보다 훨씬 적은 화를 입었어도

백배... 천배... 속을 끓이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 속에 있단 말이에요.

이게 바로 인격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예수님도 제자 열둘을 데리고 삼년동안 공생활하시면서...

속 끓일 때가 왜 없으셨겠어요?

언제?

제자들이 말 안들을 때........아이구, 참~~

제일 속 뒤집어 놓는 인간이 내가 볼 때 둘이야.

첫 번째는 베드로, 베드로는 쪼끔 좋게 얘기하면 사람이 순박하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조금 무식하고... 그래서 생각이 떠오르면 그걸 거르지 못하고 그냥 내뱉어요.

아~~ 그러니까 예수님한테 무슨 소리까지 들어요?

“사탄아, 네놈은 사람의 생각만 하고 하느님의 생각은 하지 않는 구나!”

“예수님, 목숨 바쳐서 주님 지킬 겁니다.”

했던 고 입술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첫닭이 울기도 전에 몇 번 배반해요?

세 번.... 예수님 속 뒤집어놓은 대표적인 인간이 베드로예요.


그다음에 또 깐죽깐죽 거리면서 예수님 속을 뒤집은 놓은.....

지깐에는 대단히 똑똑한 게 토마예요. 토마....

토마는 아주 이성주의자이며 합리주의자죠.


놀랍게도 예수님의 위대한 말은 참 이상하게도 예수님이 열 받고 화날 때....

기가 막힌 말이 나왔어요.


대부분 화날 때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뭐예요?
폭언이 나오고 포악해지는데 오늘 복음에 나왔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위대한 말도 토마사도가 그 말을 나오게끔 했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설명을 다 하셨잖아요?

다른 제자들은 속으로는 궁금하지만  못 물어봐요.

토마는 안 그래.. 성격이.....

아니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쫓아간다는 말입니까?

스승이 생각할 때 ‘이 건방진 놈이 따라오라면 따라올 것이지... 꼭 톡톡 튀어나와.’

예수님은 토마의 얘기를 들으시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토마사도가 예수님 열 받게 해가지고 나온 위대한 말, 또 뭐가 있어요?

예수님 옆구리에다가 손가락 쑤셔 집어넣어보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뭐라 그래요?

예수님 원래는 안 나타나려고 했는데 도마 때문에 열 받아서 나타나신 거예요.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진복자니라.’

이 기가 막힌 말이 토마사도가 예수님 열 받게 해가지고 나온 말이에요.


여러분들도 저 열 받게 한 번 해보세요.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

토마의 성격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하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어요.

토마는 너무나 정직하고 열성적이어서 막연한 신앙, 얼치기로 알고 있는 신앙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확신을 갖기 위한 의문을 늘 갖고 있는 사람이 사도 토마였어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위대한 말씀이 의심한 자의 물음으로 나왔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신비입니다.

누구도 자기 자신의 의심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하는 자는 나중에 반드시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도 토마가 확신에 이르기까지는 굉장히 과정이 복잡했어요.

물어봐야 되고, 확실한 답변을 들어야 되고....

그러나 일단 확신에 이르면 어떻게 되느냐?

토마는 인도로 가서 순교자가 되었죠.

원주님들의 칼에 맞았고 창에 찔려서.....목숨을 바쳤습니다.

확신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지 의심은

그걸 대답해줄 수 있는 영적조언자들에게 자꾸 청해서 들어야 되고...

때로는 피정을 통해서 하나하나 몰랐던 것이 알려지고, 테이프를 통해서 또 알려집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궁금한 건 많은데 그것을 풀려는 노력이 하나도 없다!


본당 신부님 일 년에 몇 번씩 피정지도 예약해놓고,

‘오십시오. 좋은 강사님이 오니까 듣고 여러 가지로 많이 배우십시오.’

하다못해 주일 강론 때도 뭔가 하나하나 ‘와~ 이제 궁금했던 게 풀렸구나!’

이렇게 깨달아 가야하는데 궁금한 건 많지만 궁금한 걸 풀려고 하는 노력이 없을 때는

그 의심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의심이 되겠죠.


토마는 그렇게 살지 않았어요.

확신에 이르기 위한 의심을 했고

예수님께 가서 자꾸 매달리고, 구하고, 두드리고 도움을 청했죠.

주님이 어디 가시는지도 모르는데...우리가 어떤 길을 따라가야 된단 말입니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토마사도의 질문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이 위대한 말은 나올 수가 없었을 겁니다.


오늘 주님은 당신을 세 가지로 표현했어요.

첫 번째, 길이요!

두 번째, 진리요!

세 번째, 생명이다!

물론 이 세 가지 테마가지고도 며칠 동안 수도원에 가서 피정을 시키는 큰 테마입니다.


성서에 보면 길은 두 가지로 나옵니다.

좋은 길과 나쁜 길.....

좋은 길은 덕행의 길이고, 완전한 길로 표현이 됩니다.

잠언 8장 20절좋은 길은 정의를 실천하는 길이다.

시편 119장 30절진리에 대한 충실로 나가는 길이다.

이사야서 59장 8절에 평화를 추구하는 길이다.

이렇게 좋은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약속한 것이 뭐냐!

장수와 번영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습니다.

지금은 뭐 동네마다 다 아스팔트가 되어있고, 콘크리트가 쳐져있지만

옛날에는 흙길도 있고... .. 많은 길이 있어요.

굽은 길이든 아스팔트 길이든...

길이 존재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길은 밟히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뭐 하는데요?

밟히는데...그렇지요~~

‘너희들 나한테 손 대지 마!’

이렇게 밟히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이 밟고 다니는 길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

예수님이 길이면 우리도 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밟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남을 밟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 밟힐 때가 편합디까?

아니면 남을 밟고 지날 때가 편합디까?

그런데 왜들 밟으려고 하지.... 밟힐 생각은 왜 안 하시느냐! 이거예요.

섬김을 받을 때 보다는 섬길 때가 편하듯이....

사람들이 나를 밟고 지나갈 때가 더 행복해요

밟힌 사람은 두 다리를 뻗고 자지만.....

밟고 지나가는 인간은 두 다리를 못 뻗고 잡니다.


어떤 길이든지 길의 존재 이유, 첫 번째는 밟히는 데 있습니다.


두 번째 길의 존재이유는 목적지 까지 데려다 주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길이 없다면....터널이 없다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옛날에 청주 가려면 비포장도로로 돌아 돌아 가느라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강원도 경포대 한 번 가려면 또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지금은 고속도로가 쫘~악 뚫려서....

대관령도 굽이굽이 돌아갈 필요도 없이 터널 몇 개만 지나면 경포대 앞바다가 보여요.


길의 두 번째 존재 이유는 고생 안 시키고,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는 데 있다!


예수님이라고 하는 큰 길에만 올라서면...그 길만 따라 가면.... 어디가 나오는 거예요?

그렇지요..天國이 나오는 거예요.

길 위에 올라서도 우리는 자꾸 한 눈을 팔고 옆길로 새려고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뭘 붙들고 가야 되요?

10계명을 붙들고 가야 되요.

교회의 가르침을 붙들고 가야 되요.

성서의 말씀을 붙들고 가야 되요.


길 위에 올라섰어도 자꾸만 빗나가려고 하는

나를 바로잡아주시는 그 분이 누구냐!

성모님이시고 성령이시지요.


이렇게 길 위에 올라섰다고 하더라도...

힘은 들어도...

지금은 끝이 안 보여도...

이 길만 따라가면 내가 원하는 목적지, 천국을 갈 수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이 마귀라고 하는 놈은 그 길에서 자꾸 벗어나도록 유혹을 한다 말이에요.

그렇기에 성령께 도움을 청해야 되고

교회의 가르침을 늘 경청해야 되고

10계명대로 내가 살았는가를 늘 반성해야 되고

성서를 시간 날 때 마다 읽고 쓰고 묵상하면서

가르침이 내 우둔한 머리를 깨우쳐서 영적 분별을 하게끔

자꾸 나 자신이 길 밖으로 벗어나지 않게끔... 노력을 해야 됩니다.


좋은 길의 목적은 밟히는 것이요.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는 데 그 존재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저절로 정의를 실천하게 되고

진리에 대하여 충실을 갖게 되고

평화를 추구하게 되고....

이때 자손들에 대한 축복, 장수와 번영을 약속하신 것이

교회, 성서의 가르침이지요.



성서에는 두 번째, 나쁜 길이 등장합니다.

잠언 28장 18절에 나쁜 길은 굽은 길로 표현이 되지요.

죄인의 길은 구부러지고 의인의 길은 곧다!

죄인의 길은 구부러져 있다

굽은 길을 가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잠언 12장 15절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제 잘난 맛에 살 것이다!’

굽은 길은 죄인들이 가는 길입니다.

굽은 길은 악인들의 길입니다.

예레미야  12장 1절에 보면

어찌하여 악인들이 매사에 성공합니까?

성공하려면 악인의 길을 가야만 됩니까?

왜 선한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악인들은 하는 것마다 성공을 하고 매사에 잘 됩니까? 

대답 좀 해 보십시오!

예레미야가 하느님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얼핏 보면 악인들의 길이 훨씬 더 쉽고, 빠르고... 진리처럼 보입니다.


성서의 결론은 뭐냐!

지금은 악인들이 다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죄인들이 가는 굽은 길을 가다보면....

결국에 멸망과 죽음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 구약과 신약에 흐르고 있는 전체의 메시지입니다.


좋은 길, 나쁜 길....이 두 가지 길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 자유지요?

그러나 선택에 따른 책임은 각자가 반드시 져야 될 겁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고, 선택하는 사람이 적은 반면에

죽음에 이르는 길은 넓고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마태복음 7장 13절에 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주님은‘나는 진리이다!’

사제는 내 말이 진리이다! 이렇게 얘기 못하지요.

추기경님도, 교황님도 내 말이 곧 진리이다... 이 말을 못하지요.

나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할 뿐이다!

이렇게 밖에 이야기 못 합니다.


제가 아무리 피정지도를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을 진리야!”

이렇게 건방진 말은 없지요.

감히....오직 내 자신이 진리라고 하실 분은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진리에는 도덕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진리, 다 같은 말입니다.

도덕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배우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순결의 필요성을 가르치면서 간음하는 자!

관대함의 가치를 가르치면서 탐욕스럽게 사는 자!

겸손을 가르치면서 횡포 하는 자!

인내를 가르치면서 누구보다도 성질 급한 자!

용서를 가르치면서 늘 남을 저주하는 자!

이런 자들이 가르치는 것은 효력이 없습니다.


도덕적인 진리는 모범을 보임으로서 가르쳐야지...

말만으로는 절대 가르칠 수 없습니다.

물론 자기가 가르치는 진리를 100% 실천하는 교사는 없을 겁니다.

적어도 저 분은 당신이 하는 말을 무던히도 지키려고 애를 쓰신다!

그런 평가를 들어야 위선자가 아니지....

하는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를 때는 위선입니다.


어느 가난한 동네에 피정을 하러 갔더니....

내가 피정시키러 가기 한 달 전에 어느 회장님이 와서 피정을 시켰대요

하루 종일 얼마나 뜨겁고 열렬하게 피정을 했는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대!

회장님이 떠나실 때 그 본당회장님이 차창 너머로 강사비를 드렸대요.

“회장님, 강사비 약소합니다.”

 

차가 나갔다가 1분 후에 다시 들어오더니

“회장, 이리 와 보시오.,아니,이걸 돈이라고..강사비라고 주는 거요!”

팩~~ ’집어던지고 가더래요.

그 날 그 피정의 은혜를 나누기 위해서 남아 있던 신자들이

아직 눈물자욱도 마르지 않았는데... 그 광경을 다 본거야!

그 강사가 아무리 은혜롭게 신자들을  피정을 시켰다 하더라도....

강사비 적다고 돈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갈 때 그건 위선자...위선자이지요!


도덕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들이 잘못 살 경우에는

큰 심판을 받을 각오를 해야 됩니다.

한평생 피정지도를 하는 제가 여러분들보다 잘 못 살았을 때는

똑같은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분명히 더 큰 심판을 받을 겁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들은 진리를 가르쳐야 될 크리스천입니다.


베드로 전서에 보면 이방인들 앞에서 행실을 단정히 하라고 그랬습니다.

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은 다 이방인들입니다.

세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 앞에서

세례 받지 않은 내 며느리 앞에서

세례 받지 않은 내 사위 앞에서

세례 받지 않은 내 남편 앞에서

도덕적인 진리와 행동을 올바르게 보여줄 때

“나 좀 성당에 데려다 주면 안 돼? 교리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오히려 그 쪽에서 이렇게끔 스토리가 돌아가야지...


“내 성당 나가려고 한 지가 10년인데...교리반에 나가려고 할 때마다 너 난리 치는 걸 보면 ...내가 천주교 천자만 들어도 정내미가 뚝뚝 떨어진다! 나 이렇게 사는 게 편해... 성당 다니다가 너처럼 가 엉망진창으로 될까봐 내 못 나가겠다.”

이건 걸려 넘어지게 하는 큰 스캔들입니다.


학구적이거나 과학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은 지가 가르치는 내용과

살아가는 꼬라지가 개판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돌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서 도덕적인 진리를 외쳐야 하는 사람들은

입으로만 떠들 것이 아니라 분명히 행동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답변에이어집니다~~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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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성가 290번 / 복음을 전한 사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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