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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난과 비천의 신비
작성자김열우 쪽지 캡슐 작성일2011-05-03 조회수408 추천수5 반대(0) 신고

저를 비롯,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을 혐오하고, 부()는 선망합니다.

()를 목숨처럼 여기고, 심지어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과도 바꾸려 듭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궂이 가난을 선택하고, 사람들에게도 권하며, 부()를 경계하셨습니다.

당신 친히 낮은 땅, 가장 비천한 곳, 마구간의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33년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예수님께서 반기신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난하고, 병들고, 죄를 지어 세상에서 버림받고, 소외되어 돌봄을 받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갚을 것이 있는 사람들보다,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갚음을 받지 못하였던 것을 하늘 나라 의인들의 잔치에서 초대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며,

애통하는 자가 위로받게 될 것이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리하면,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시리라!

겉옷 달라 하면, 속옷도 내어주라!

예수님의 경제 관념은 세상의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은 사망으로 인도하고, 찾는 이가 적은 좁고 협착한 길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난과 비천의 가치는 신비스러울 만큼, 대단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깊은 잠에서 깨워 사람을 살려냅니다.

가난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과 동병상련(同病相憐), 함께 아파하고, 위로할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부요는 그 중요한 것들을 느껴야 할 눈을 감겨, 사람의 가치를 잃게 합니다.

부족함이란 없는 에덴에서 사람은 타락의 길을 갔습니다.

솔로몬의 부귀영화는 그를 실패하게 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풍요도 사람을 패망케 하는 요인일 뿐이었습니다.

부요는 사람에게는 물론, 하느님께도 도전하는 교만이 깃들도록 합니다.

부는 잠시동안 사람을 편하게 하여 주나, 영원한 삶과 복락을 기약하지는 않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 천하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영혼의 복지는 에덴도, 부귀영화가 극한 왕궁도 아닌, 가난한 마음의 겸허함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몰락으로 이끄는 부()를 구태어 경계하신 것입니다.

인생의 최종 목표는 잠시 지나고 말, 세상의 부귀영화, 존귀가 아니고, 하느님 나라의 평안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평소 등불의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여 두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들에게 서로 부족할 것이라며, 기름을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기름을 파는 상인들에게 가서 사 가지고 오는 동안 혼례식은 시작되었고 문은 닫혀, 결국 그들은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그 기름은 평소, 하느님 말씀을 따라 사는 가난한 마음과, 선행, 기도, 성령과의 친교등이 아닐까요?

세상에서 낙원과 같은 안락과 즐거움을 보장하는 부(富)가 천국의 장애물이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편을 끼치는 가난은 천국에 드는 지름길이 되는 셈입니다.

 

세상에서 칭찬받은 일 때문에, 천국에서는 상이 없고,

세상에서 즐겁게 살았던 이유로 세상 끝 날에는 슬퍼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주님과 그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았던 일 때문에 하늘에서 상을 받고 기뻐 뛰놀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존귀한 아들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혐오하는 죄인들이 매달리는 십자가의 형틀에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못 박히셨습니다.

주님께서 감내하신 가난과 비천, 수난들은,

부활의 영광을 누리며, 만민을 살리는 구세주, 만왕의 왕, 만민의 심판주가 되게 하였습니다.

2011년 5월 3일 오전 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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