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다시 한번 부활 축하합니다.
오늘 1독서에 보면 솔로몬 행각에서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마귀 들린 자, 병 들린 자, 많은 환자들이 와서 제자들에 의해서 치유와 구마를 받습니다.
오늘 이 성모 순례지에 오신 여러분들, 또 주일날 주일을 지키시기 위해서 오늘 성모님 앞으로 또 예수님 앞으로 오신 여러분들!
분명히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에 솔로몬 행각 앞에서 일어났던 그 수많은 치유와 기쁨의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복잡한 생각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하는 죄의식,
또 이제껏 3년 동안 뭐라도 한자리 해먹을 것 같아서 주님을 쫓아다녔는데, 이제는 어떡할까?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
또 혹시 예수 따라 다녔던 제자라고 해서 로마병정들이 우리를 잡으러 오는것이 아닌가 하는 이런 두려움!
이런것 때문에 다락방에 모여서 평화를 잃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문이 잠겨있었는데도 그 제자들 앞에 나타나서
도마에게 한 것까지 합쳐서 세 번이나 똑같은 얘기를 하십니다.
무얼 주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첫 번째 선물은
“너희에게 평화를!”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너희에게 평화를!”
성체를 영할 때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죄중에서 가장 큰 죄, 죄의식이 가장 드는 죄는 하느님을 버린 죄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떨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사형을 달성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아마 자기들의 차례가 돌아 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에,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에 귀를 곤두세우면서 숨어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너희에게 평화를!”
그리고 제자들에게 죄를 사하는 권한을 주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자리에는 누가 없었습니까?
사도 토마가 없었습니다. 토마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상당히 부정적인 사람으로 비쳐집니다.
2000년동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래서 토마스에게
‘의심쟁이 토마스, 믿지못하는 토마스’라고 하는 좋지 않은 별명이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도마는 결코 용기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날때 부터 상당히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서 여러 곳에서 토마가 예수님을 사랑했었다는 이야기가 아주 강하게 나옵니다.
다른 제자들은 망설이고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도마만큼은
‘저는 예루살렘에 가서 선생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할 정도로
토마스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실로 이루어졌을 때, 토마스는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너무너무 실망이 컸습니다.
그는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제자들의 눈을 피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의 주제는 ‘사죄권’이 아니라 바로 토마의 얘기입니다.
교리를 가르치다가 보면 교리 6,7개월 하는 동안에 한 번도 질문을 안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분은 교리를 매시간 할 때마다 질문을 합니다.
지난주에 배운 것을 일주일 내내 곰곰이 생각하면서 받아들일 거는 받아들이지만 이성적으로 뭔가 부딪히는 것에 대해서는 메모를 해가지고 와서 교리 시작할 때 꼭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시원한 답이 나올 때까지 또 질문을 하고 또 질문을 합니다.
대개가 질문을 많이 하고 세례를 받으시는 분들이 나중에 보면 큰 일꾼이 됩디다.
하나하나 완전히 깨닫고 나간다는 그 뜻이죠!
물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 작은 이 머릿속에 무한한 하느님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무한한 것이 어떻게 유한한 것에 들어가겠습니까?
그래서 아우구스딩 성인은 여러 가지 신비를 묵상하다가
<그저 믿을 뿐이옵니다!>
오늘 토마스에게 예수님은
‘도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진복자다.’
제가 가끔 얘기하는 것이지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무식하리만치 우직한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일단 신앙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여러분들 이 세상 태어나면서 엄마 확인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한 번도 이분이 내 엄마라고 하는 것을 의식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한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턱밑에 점있는 요 여인이 내 엄마구나!’ 확인한 사람 없지만 믿습니다.
본적이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눈에나 제 눈에나 이 종이가 무슨 색으로 보이죠? 흰색이죠?
근데 내가 이 종이를 가지고 검은색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반발하실 겁니다.
분명히 이거는 과학적으로 증명을 해도 흰 종이지 검은 종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내려다보시고
“그게 어찌 흰 종이냐? 내 눈에는 꺼멓게 보인다.”
요렇게 얘기하셨을 때 갈등이 옵니다.
요랬을 때, 종교인들은 눈알을 땡그랗게 뜨고 뎁빕니다.
“아이구, 이제는 연세가 많으니까 인제 하느님이 치매가 오셨어. 이제 어찌 검은 종이야? 흰 종이지?”
하고 뎀비는m게 그게 종교인입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은 정말 믿음이 있는 자들은 속으로는 무지하게 떫어도
“자세히 보니깐 까맣긴 까마네요.”
이게 바로 신앙인입니다.
토마는 물론 전자였습니다.
“이게 어찌 흰 종이요? 검은 종이지? 하고선 아니 껌은 종이요? 흰종이지?” 하고 덤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은 토마에게도 우리가 배울 점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또 토마의 악습도 분명히 있습니다.
첫 번째, 도마는 영적인 교만을 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마의 잘못은 형제들과의 일치를 피했습니다.
그는 함께 있는 것보다는 홀로 있는 것을 더 원했습니다.
그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의 최초의 모습을 못 봤던 겁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로부터 벗어날 때 신자들은 많은 것을 잃어버립니다.
살면서 슬픔과 비참하고 고통이 올 때 마다 우리들은 스스로를 닫아버리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거절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교회를 멀리하지 말고 하느님께 매달려야 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기도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머물러있어야만 우리는 부활한 주님을 봅니다.
지금은 교리를 가르칠 때 개인구원을 강조하기 보다는 공동체적인 구원을 강조합니다.
우스갯소리가 있지요?
베드로 사도가 천국 문을 지키고 있는데 그 천국 문 위에 이렇게 현수막 걸리듯이 현수막이 하나 걸려있는데 거기 뭐라고 써 있는 줄 압니까?
<개인사절, 단체환영^^>
다시 말하면 천국은 그 가정에 특별난 한사람 열심한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다 구원되길 원하고, 그 구역이, 그 반이 본당이 다 같이 구원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공동체적인 구원입니다.
도마의 악습은 뭔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비판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가운데 머물러있는 것보다는...
물론 러시아의 유명한 철학자가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에 대해서 단 두 마디로 요약했죠.
<고독하면서 동시에 사회적이어야 된다.>
반드시 우리는 고독이 필요합니다.
고독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 깊이 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고독이 고독으로 끝나면 안 되고
고독을 통해서 얻은 영적에너지를
내 주변 사람들과 같이 더불어 살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있으면서 혼자 열심히 기도하고 묵상하는 거 좋아하는데 절대로 본당에서 신자들과 어울리는 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뭔가 불안한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너무너무 사회적입니다.
본당에 아무튼 단체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일년내내 기도를 안 합니다.
술자리에 가면 항상 있지만 묵주기도 하는 거 본적이 없습니다.
이상적인 인간은 고독하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인간이다!
도마는 제자들과 같이 비록 앞날이 불확실 하더라도 같이 머물러있었어야만 됐었습니다.
그러나 도마에게는 두 가지 뛰어난 덕이 있었습니다.
도마는 믿고 있지 않는 때는 믿는다고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아는 척 하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았던 겁니다.
도마에게는 타협하지 않으려는 성실함이 있었습니다.
도마는 의문이 있는데도 의문이 없는 것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확신해야만 했습니다.
‘얼치기로 알고 있는 신조보다는 성실한 회의 속에 참다운 신앙이 살아있다.’고 유스티노 성인은 얘기했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아니한 것, 또 실제로 믿지 아니한 것에 대해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줄줄 유창하게 되풀이하는 것 보다는 이해가 갈 때까지 졸라대는 그러한 사람 속에 궁극적인 신앙이 자리합니다.
두 번째, 도마의 좋은 모습은 일단 확신이 들기만 하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여드레째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서
“도마야, 그래 니 손가락으로 내 못자욱을 한 번 집어넣고......옆구리 한 번 집어넣어봐라. 도마야! 너는 어찌 나를 보고야 믿느냐?” 했을 때,
도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단 두 마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도마는 확신에 이르기 위해서 의심했던 겁니다.
확신에 도달하기만 하면 그 확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도마의 모습이었습니다.
거룩한 의심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 후에 도마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도마행전’이라고 하는 외경에 보면 그의 전기를 알려주는 것이 적혀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제자들 사이에는 이 세상을 구분해서 그에 따라서 제각기 여러 나라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나가게 됐습니다.
제비를 뽑아서 도마가 걸린 데가 어디냐!
지금의 인도 땅이었습니다.
당초에는 인도에 가기를 거절했다고 그럽니다.
도마는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다 보니까
‘“나는 그렇게 긴 여행을 할 만큼 건강하지도 않고 그리고 나는 그렇게 미개인들이 사는 곳에 가서 선교할 수 없다.”
밤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가라고 했지만 그때도 여전히 거절했다고 그럽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했느냐!
인도에 큰 궁궐을 짓기 위해서 유대에 있는 좋은 목수를 구하기 위해
인도의 재상이 왔을 때 그 재상의 꿈에 나타나서
“내가 노예를 데리고 있는데 그 노예를 팔고 싶다. 어디어디로 가면 지금 그 노예가 자고 있는데 그 노예의 이름이 도마다”
밤중에 일어나서 인도의 재상은 예수가 알려주신 그 곳에 가서 도마를 데려다가 인도로 끌고 갔습니다.
도마는 인도에 가서, 인도의 지금 현재 남부를 선교했고
마지막에는 원주민의 창에 찔려서 순교를 합니다.
지금도 도마사도의 무덤은 유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 남부에 가면 도마사도의 무덤이 있습니다.
도마와 같은 신앙은 말뿐인 신앙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도마는 심사숙고하지 않고 나중에 약속을 어기는 안일한 맹종보다는 훨씬 더 적극적인 신앙인입니다.
중요한 것은 도마사도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그 과정이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결론을 주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진복자다!>
오늘 주님께서는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체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주님 안 계십니다.
그러나 그 안에 예수님 계심을 믿습니다.
사제의 말씀을 통해서 지금 여러분에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계시고, 성모님 계십니다.
잠시 후에 성체성혈 축성할 때 이 제단 위로 천사들이 날아다닐 겁니다.
그리고 사제가 성체를 들어 올릴 때
성모님께서는 유일하게 제단 앞에 무릎을 꿇으십니다.
그 성체를 여러분들이 영하십니다.
오늘 이 미사 중에 그런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체를 영하는 즉시 나는 그리스도가 됩니다.
감실 안에 계신 예수님이 됩니다.
성체를 영하시고 자리에 들어가셔서 성가 부르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체를 영한 즉시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되기 때문에 스스로 치유기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손이 되기 때문에 아픈 곳에 대고 기도하십시오.
주님 당신의 손이 제 아픈 곳을 치유해 주심을 믿습니다.
주님, 제 머릿속에 뭐가 자라고 있다고 그럽니다.
저 상처 있습니다.....
치유시켜 주십시오!
마음이 아프신 분들은 가슴에 손을 대고
내 부모로부터 상처 받은 것 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상처 받은 것 있습니다.
치유시켜 주십시오!
성모님께서 울타리가 되어서 오늘 하루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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