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들이 먹을 빵 (요한 6, 1-15)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셨다.
예수님의 이런 질문에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려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고 대답하였고 안드레아는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제자들의 대답을 들어보면 절망적이고, 비관적이고, 무책임하고, 부정적이다. 필립보는 아예 처음부터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고, 안드레아는 작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 소용도 없다는 절망적인 대답이다. 어떤 일 앞에서 아예 처음부터 절망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인생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다. 많은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되게 하려고 하지 않고 처음부터 무조건 안 된다, 할 수 없다, 그것으로는 턱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을 한다. 길을 물어도 모르겠는데요, 무엇을 부탁해도 안 되는데요, 할 수 없는데요, 어떤 일을 맡겨도 시키는 것만 하고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것, 이것이 요즈음 사람들의 모습에서 너무나 많이 보게 된다. 무책임, 부정적인 사고, 절망적인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한 번 뿐인 인생을 왜 그렇게 사는가?
예수님은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시는 것을 보시고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었고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에서 예수님이 갖고 계신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그 해답을 갖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내 생각대로 하려고 한다면 굳이 기도를 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기도한다는 것은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하면서 이미 해답을 알고 계신 하느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 보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기도이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물으신다. 하느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봉헌한 회원들에게 물으신다. " 저기 지나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네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너와 함께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너에게 오는 수 많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그동안 우리들의 삶이 제자들처럼 무책임하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그들에게 아무런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지 못하는 실망스런 대답만 하고 있지 않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제자들의 실망스런 대답과는 정 반대로 예수님은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여라."고 우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신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다음 그냥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라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음 다음에"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얼마나 타인에 대한 섬세한 배려인가? 이러한 배려를 통해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자리가 활기가 넘치고 금방 풍요로워졌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생각했던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재료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이 세상에 어떤 것도 그냥 버려져서는 안 된다. 짜투리 시간들, 남은 음식물들, 안 입는 옷들, 등은 모두 다 요긴하게 쓰일 것들이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내가 갖고 있는 많은 것들은 배고픈 이들에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헐벗은 이들에게, 길에 내몰려진 이들에게, 상처받은 이들에게, 목마른 이들에게, 외로운 이들에게 큰 선물로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 건강, 재능, 재물, 맡겨진 일, 은총 등을 낭비한 일은 없는가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없다, 왜 나에게는 이것밖에 주시지 않았는가? 이 작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작은 것이 어디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불평하고 실망하기 보다는 그 작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작은 것을 나누고자 하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고 오늘 우리에게 물으신다.
예수님은 "너희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우리가"라고 하셨다. "너희가"라고 하셨다면 제자들이 알아서 사 오라고 하시는 것이겠지만 "우리가"라는 말씀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예수님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너희들만이 사 오려고 하려면 어렵겠지만 예수님과 함께 즉 우리가 함께 사 오려고 한다면 못할 것이 없다. 무엇이든지 가능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 오려고 하는데 안 될 것이 무엇이며 못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우리의 힘으로만 하려고 한다면 안 될 일들이 많이 있겠지만 예수님과 함께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고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빵을 사 올 수 있다.
"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신다. 어디에서 그 많은 빵을 사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 올 수 있는 곳을 알아야 사 올 것이 아닌가?
우리가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사러 갈 곳은 시장도 아니요, 빵 가게도 아닌 예수님의 마음이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면 우리는 얼마든지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충분한 빵을 사 올 수 있다. 예수님의 마음에 가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사 오려고 하니까 빈곤함을 느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에 가 보라. 얼마나 많은 빵이 있는 가를 보게 될 것이다. 오천 명이 아니라 오십 만명을 먹고도 남을 충분한 빵이 창고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을 묵상한다는 것은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빵을 예수님한테 사러 가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 묵상을 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복음 묵상을 깊이 하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 해 보라. 내가 만나게 될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빵을 줄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빵을 주어야 하는지를 알 것이다. 우리는 먼저 복음을 충분히 묵상함으로서 나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빵을 충분히 갖고 있어야 한다.
제자들이 자기들과는 다르게 살아가시는 예수님의 삶의 방법을 새롭게 체험하였듯이 우리도 복음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복음을 묵상하기 전이나 묵상을 한 후에나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깨달음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방식대로가 아닌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삶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담아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눈을 떠야 한다. 그것이 오늘 내가 무엇 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하느님의 사람은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부정이 있는 곳에 정의를, 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사람이다.
작은 것을 요긴하게 사용할 줄 아는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어느 곳에 가든지 또 어떤 상황이든지 우선 남을 위한 배려는 남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하느님의 사람은 그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금방 금방 알아차리는 사람이다.
그냥 넋 놓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가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것이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눔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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