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뜻>(요한 6,35-40)
-유광수 신부-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당신 뜻을 실천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뜻은 무엇인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무슨 뜻을 갖고 태어난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내 뜻이란 있는 것인가? 있다면 나의 뜻은 무엇인가?
나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내 뜻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 뜻이라고 많은 말을 했고 또 그 뜻을 이루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내 뜻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아니다. 사실 "나는 이것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 뜻이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모른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나의 뜻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어느 날 내가 태어나게 되었을 뿐이다. 왜 태어났는지 무슨 목적을 갖고 태어났는지 어디로 가기 위해서 태어났는지 무슨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이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나의 뜻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내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만 내가 만들어 놓은 허상일 뿐이다. 내가 내 뜻이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내가 태어난 것은 정말 아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아는 분은 오직 한 분 즉 나를 창조하신 분,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만이 안다. 나는 내 뜻에 의해 태어 난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분의 뜻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따라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뜻이 무엇인지는 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나의 성소요, 찾은 그 뜻을 사는 것이 나의 성소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의 뜻만을 고집하며 그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이고 내가 이 세상에서 반드시 펼쳐야할 뜻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온 경우가 많이 있다.
나의 뜻이라고 고집할 때 대부분의 경우 나의 욕망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즉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도 있다.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밀쳐 내는 경우도 있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싸우고 불평하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나의 뜻일 수는 있지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아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아니다. 그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무엇인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나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살리는 일이요, 그 일은 아들을 보고 믿게 하는 일이다.
유다인들은 빵을 먹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표징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표징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부활 시기 동안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는 지혜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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