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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이 없는 곳에도 진실이 있을까?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1-05-12 조회수371 추천수5 반대(0) 신고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
요한 6:35-40)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은 아폴로 우주선을 성공적으로 발사시켜 인류 최초로 닐 암스트롱을 달에 착륙시켰다.
브라운 박사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였다.
“과학은 의문을 놀라움으로 바꾸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에는, 심지어 아주 작은 분자에서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연에는 소멸은 없고 오직 변모만 있습니다. 저는 과학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습니다만, 과학은 사후(死後)에도 우리들의 영혼이 계속 살아있게 된다는 믿음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영원한 생명의 디딤돌에 지나지 않는다. 이 디딤돌을 찾기만 하면 쉽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1요한 4:8) 
사랑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의 디딤돌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
이를 루이스(C. W. Lewis)는 재치 있게 설명했다.
저는 이 세상은 결코 저를 만족시켜주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세상을 위하여 태어났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그의 책 『소명』에서 “세속적인 것을 희생시키고 영적인 것을 격상시키고 있는 것을 ‘가톨릭적인 왜곡’이라 하고 영적인 것을 희생시키고 세속적인 것을 격상시키는 것을 ‘개신교적 왜곡’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며칠 전 전(前) 구역의 형제 모임에 참석하여 한 형제님이 이 ‘왜곡’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우리 본당에서 한 신자가 신부님께 “신부님은 너무 신학적으로만 강론하신다.”고 한 사건(?)이 오금동 성당에도 소문이 나있었던 것이다. 그 신자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다가 ‘가톨릭적 왜곡’과 ‘개신교적 왜곡’이란 말이 떠올랐다.
나는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과연 무엇을 왜곡시키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구원’과 ‘고통’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원’을 ‘하늘나라로 가는 것’으로 해석하고 하늘나라를 사후(死後)의 세계로 해석하여 신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복신앙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든 헌금만 많이 내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고통’에 대한 해석도 그렇다. ‘고통의 신비’라고도 하면서 고통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시느냐 주시지 않느냐 하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복신앙을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고통을 준다고 하면 아무도 그런 종교는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일까? 나는 하느님께서 무지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어 완전한 인간을 만드시려고 한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순전히 교회의 외적인 발전을 위하여 이렇게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보면 기쁨과 평화를 찾아가지 못하도록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된다.
성령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양에 비유한 것을 보고 무릎을 쳤다.
양은 고도의 근시(近視)이며 주관(主觀)도 없다.
이 때문에 선두에 있는 양을 졸졸 따라다닌다. 양은 오로지 풀만 뜯어 먹으려고 한다.
양은 희생될 때에도 머리를 내밀고 가만히 있지만 염소는 저항한다고 한다.
우리 인간은 순종하는 것만 빼고 양과 똑 같다.
성직자들은 선두(先頭)에 선 양과 같다.
 
영국의 시인 매튜 아놀드(Matthew Anold)는 그의 시 <도버 해협>에서
사랑하는 이여, 우리 서로에게 진실 합시다.”하고 노래하고 있다.
 
사랑이 없는 곳에도 진실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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