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부활 제4주일 2011년 5월 1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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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1-05-13 | 조회수407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부활 제4주일 2011년 5월 15일
요한 10, 1-10.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양들의 목자, 또 양들이 드나드는 문에 비유하였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목자이십니다. 도둑이나 강도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갑니다.’ 그러나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고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며,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목자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릅니다.’ 목자와 양들의 관계를 말해주는 목가(牧歌)적인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신뢰와 친근감을 표현한 이야기입니다.
목자라는 단어는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친근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목자는 먼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성가로 부르는 ‘야훼는 나의 목자’라는 시편(23)이 있습니다. 푸른 풀밭으로 또 물가로 나를 이끌어주시기에 아쉬울 것이 없다는 노래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뢰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예수님을 목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시작된 일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던 하느님의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문이라는 또 하나의 단어로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얻을 것이다.’ 이 문이라는 단어도 목자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양들을 좋은 풀밭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 말합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이 복음은 목자와 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생명을 주는 예수님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서 전체에 흐르는 주제입니다. “아들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3,15)는 말씀이 있고,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1,4)는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앞서가는 목자로서 또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문으로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그분을 통해 들어가면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생명이 있는데 무슨 생명이 더 필요하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3장에서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위로부터 새로 나야 한다.”(3,3)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니코데모는 반문합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새로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요한복음서는 이 대화로써 말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신앙인이 누리는 생명은 이 세상의 생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알려진 하느님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생명 안에 그분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베짜다 못에서 병자를 낫게 한 생명이고(5,1-9), 율사와 바리사이들이 율법의 이름으로 돌로 치려는 여인, 곧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그들의 손에서 살려내고 그에게 용서를 선포한 생명입니다(8,1-11). 그 생명은 제자들의 발을 종과 같이 엎드려서 씻은 섬김의 생명입니다(13, 1-17). 그 생명은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은 사랑과 헌신의 생명입니다(19,30). 그 생명은 자기 한 사람 잘 살기에 급급해서 자기 주변의 생명들을 외면하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 생명은 주변 사람들을 밀쳐내고, 음해하고 기득권자에게 아부하는 생명이 아닙니다. 자기의 주변 사람들을 위해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고 헌신하는 생명입니다. 굶주리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며, 우는 사람을 위로하는 생명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 생명이 하느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하여 다시 태어난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을 모범적으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을 실천하며 인류대열에 앞장 서 가신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하나 그런 실천에로 불러내는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문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을 압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좋은 풀밭, 생명의 풀밭으로 나갑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을 목자와 문에 비유하여 설명하기 위해 대조적으로 끌어들이는 주제가 ‘도둑과 강도’입니다. 그들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갑니다...양을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요한복음서가 도둑과 강도라고 말할 때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한 그 시대 유대교의 실세들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후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데에 앞장섰던 율사와 사제들을 지칭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권위와 부귀를 위해 이스라엘을 “목자 없는 양떼 같이”(마르 6,34) 만들고,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였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시대에나 예수님의 일을 왜곡하며 양들의 생명을 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생명과 무관한 일을 강요하는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재물 혹은 권력을 얻는다는 가르침이 있고, 교회에 많이 바치면 하느님이 많이 주신다는 말도 있습니다. 기적을 한다고 떠들면서 신앙은 기적이라는 요술을 하는 데에 있는 양 사람들을 오도하는 행위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며 자기에게 순종할 것을 강요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목자이신 예수님, 문이신 예수님과 무관한 일들입니다. 그런 행위들은 예수님을 목자로 따르지 않고, 예수님이라는 문을 통하지 않은 ‘도둑과 강도’의 짓입니다. 자기 한 사람 잘 되겠다는 인간의 이기적 욕심을 충족시켜주는 감언이설들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이 복음을 읽는 오늘을 성소주일로 정하였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봉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자로, 또 문으로 명심하고 일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생명의 풀밭으로 인도하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챙기지 않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으로부터 배우고 그분의 뒤를 따라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생명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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