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영원한 삶" - 5.1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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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1-05-13 | 조회수379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5.13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사도9,1-20 요한6,52-59
"영원한 삶"
오늘은 ‘영원한 삶’을 주제로 하여 ‘죽음’과 ‘추억의 선물’에 대해 두루 묵상했습니다. 죽음은 세월 속에 묻혀 져 잊혀져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외 없이 누구나 죽으면 세월 속에 묻혀 져 잊혀져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땅 속에도, 세월 속에도 묻히지 않고 삶과 죽음을 넘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며 살아남은 이들에게 좋은 추억의 선물을 남깁니다.
전 번 마지막 남은, 암 투병 중인 셋째 형님을 문병했을 때 형님의 한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너 내 영정 사진 볼래.”
너무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와 음성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나였습니다. 암말기 투병 중에도 주위에 평화를 발산하는 형님입니다. 가끔 문안 인사를 드리면 ‘고맙다’ ‘편안하다’ ‘수도원 찾는 어려운 이들에게 잘 해 주라’는 세말로 요약됩니다.
현재는 효자인 큰 아들 집에 묵고 계신데 때로 힘들겠지만 아들 며느리에게는 좋은 추억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어제 전화를 드려 큰 아들을 바꿔 달라 했을 때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아들을 부르는 소리가 또 감동이었습니다.
“아들아, 아들아”
착한 며느리를 부를 때 “딸아, 딸아” 부른다 하는 데 형님에게는 너무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니 이 또한 아들 며느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신뢰의 표현입니다.
“아, 형님은 이미 생사를 넘어 영원한 삶을 누리고 계시구나.”
깨달음처럼 스쳐지나가는 생각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오로의 회심과정이 극적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심하고 새로 태어나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 바오로의 회심과정이 흥미진진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제자들에 대한 박해를 자신에 대한 박해로 동일시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바오로의 물음에 부활하신 주님은 즉각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의 은총이 바오로를 회심시켰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다 합니다. 저는 여기서 언뜻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죽음과도 같은 사흘 후 주님의 제자 하나니아스를 만나 그의 안수기도를 받고 새롭게 눈 떠 부활한 바오로입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살기를 뿜으며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삶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 선포하는’ 사도의 삶으로 180도 운명이 바뀐 바오로의 삶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극적인 회심의 은총으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 바오로입니다.
우리의 회심은 매일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일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모심으로 주님과 더불어 죽고 주님과 더불어 부활하는 회심의 체험이 이미 지금 여기서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바로 이게 성체성사를 통한 우리의 회심 체험이자 주님과 일치의 영원한 생명의 체험입니다. 이런 은혜로운 체험이 생사의 두려움과 불안을 넘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합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얼마나 은혜롭고 고마운 말씀인지요. 이 거룩한 미사 중 생명의 빵인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모심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오늘도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우리의 삶이 되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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