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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베드로의 십자가 [교황의 밀실]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5-19 조회수597 추천수2 반대(0) 신고

 

도록으로만 소개됐던 ‘성 바오로의 개종’과 ‘성 베드로의 순교’ 교황청 내 성구실 좌우 벽을 장식하고 있는 미켈란젤로 말년의 프레스코 대작. 국내 언론이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왼쪽은 ‘성 바오로의 개종’을, 오른쪽은 ‘성 베드로의 순교’. 성 바오로는 전도자였고 성 베드로는 초대 교황이었다. 이 그림은 그동안 도록에서만 볼 수 있었다. 바티칸=오명철 문화전문기자 oscar@donga.com

 
 
일반인들의 접근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바티칸 교황청 내 성구실(聖俱室)인 바오로 채플과 그 안을 장식하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대작 프레스코 벽화 두 점이 한국 언론에 최초로 공개됐다. 바티칸의 외교사절 접견실을 거쳐 극소수 인사만 들어갈 수 있는 바오로 채플은 16세기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영감을 받아 제작된 날렵한 제복을 입고 있는 스위스 근위병들이 24시간 철통같은 경비를 펴고 있다. 시스티나 성당에서 열리는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추기경은 곧바로 이곳에서 교황 상징 의상으로 갈아입고 바로 옆 발코니로 나가 성 베드로 광장에서 새로운 교황의 탄생을 고대하고 있는 신도들을 축복한다.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로마 가톨릭교회의 기본 정신과 출발점을 제공한 두 인물, 즉 전도자 바오로와 초대 교황 베드로에 대한 그림을 주문했다. 먼저 그려진 ‘성 바오로의 개종’은 1542년부터 작업에 들어가 1545년에 완성되었으며 ‘성 베드로의 순교’는 1550년에 완성되었다. 깔끔하고 기품 있는 바오로 채플 입구 좌우를 장식하고 있는 두 작품의 크기는 도록으로만 볼 때 어림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각각 6.25×6.61m의 꽤 큰 그림이다.

정면 왼쪽의 ‘성 바오로의 개종’에서 바오로는 말에서 떨어져 있는 모습이다. 성서는 바오로가 개종할 당시 비교적 젊은 사람이었다고 기록해 놓았지만 미켈란젤로는 바오로를 늙은 노인으로 묘사했다. 얼굴을 자세히 보면 작품을 주문했던 바오로 3세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미켈란젤로의 교묘한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교황이 눈먼 상태로 방향 감각을 상실한 인물로 묘사했다. 오른쪽의 ‘성 베드로의 순교’는 더 충격적이다. 해부학에 능통했던 미켈란젤로답지 않게 가운데 십자가에 거꾸로 달린 베드로의 몸집이 다른 사람에 비해 과도하게 크게 그려져 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몸을 뒤틀면서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는 순교자 베드로의 눈길이다. 미켈란젤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죽어가던 초대 교황 베드로가 자신을 처형하는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을 더 예리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모습을 그렸다.
 
그림을 찬찬히 관찰한 김 교수는 “이 그림을 가장 자주 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교황 바오로 3세를 포함한 후대의 교황들일 것이다. 아마도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을 통해 후대 교황들에게 ‘너희들도 이렇게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이 그림이 최종 완성되기 1년 전인 1549년에 운명했다. 그가 살아서 미켈란젤로가 그린 마지막 벽화를 보았다면 큰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실제로 후대의 교황들은 미켈란젤로의 두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몸을 뒤틀면서 후대 교황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외치고 있는 이 의미심장한 그림을 어떤 교황이 좋아할 수 있었겠는가. 로마와 피렌체를 스무 번가량 다녀온 김 교수는 “내 생애에 이 그림을 직접 볼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바티칸=오명철 문화전문기자  /   동아일보 5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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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오복음서 16, 24>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오복음서 10, 38>
 
동아일보의 기사내용 중에서 평소 느낀 바를 다시 이야기하고 싶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말씀하시고 또 한편 '자기 십자가'를 지더라도 "나"(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당신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단호하게 이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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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으로 말미암아 겪는 고난을 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랑 때문에 겪게 되어지는'사랑의 고난'을 말한다고 하겠다.
어떤 교설에 의해서인지 우리들 중에서는 자기가 십자가를 진다는게
마치 큰 교만이라고 여기고 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누구의 말(글)에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상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더라도 당신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당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분명히 하셨다.
 
꺼꾸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베드로의 '자기 십자가'를 묵상하자.
그는 십자가에서 피해 달아나려다가 회심하여 '자기 십자가'에 매달렸다.
 
누구라도 '자기 십자가'에서 피해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또 어떤 이설에서는 십자가에서 내려달라거나, 혹은 내려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두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엉뚱한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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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아버지의 나라가 다가온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자기 십자가'에서 피해야 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마땅히 십자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세상의 삶에서 자기가 무수한 상처를 받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그리스도적 고난)에서 달아나지 말아야 한다는 묵시인 것이다.
과거에만 해당하는 흘러간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내일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반드시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의 메세지,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게 아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너희"는 "자기 이름으로 오는 그를 받아들인다"는
예수님의 준엄한 경계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따르는) 이는
그분을 보내신 분, 하느님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십자가 인간(자기 십자가)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세상,
십자가를 통해서 오는 아버지의 나라를 맞이할 수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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