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녀와 예수님 [ 내 안에 그리고 너 안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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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이수 | 작성일2011-05-24 | 조회수53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요한복음서 15, 1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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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마태오복음서 8, 5 - 13>
우리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는 상기의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자기 안에 예수님을 모시면 겸손하지 못하거나, 혹은 불가능하다 하고 말하는 어떤 단체의 소속원들이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잘 가기 위해서는 어느 중개자가 필요하다고 절대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들 가운데는 자기 안에 예수님 보다는 그 중개자가 더 자리를 가득히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된다. 우리는 어느 누구라도 자기 안에 주님을 모실 자격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겸손한 사람은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가 아니다는 것이다. 아주 철저히 더러운 자기 자신 안에 거룩하신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않으니 거룩하신 어느 누구를 통해서만 예수님께 가야한다고 하면서 성경말씀과 다르게 전하며 또한 가르친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에게서는 흔히 예수님 보다 더 높은 그분과 예수님 말씀 보다도 더 귀한 그분의 가르침을 느끼도록 우리를 세뇌시킨다.
예수님을 통하여 죄의 속박에서 해방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는 상관없이 또 다시 죄의 종살이를 하도록 죄의 힘을 만들어 낸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은총의 힘)에 반대되는 죄의 힘을 다시 복구시키면서 사람들을 죄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한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가려면 이 구속자를 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새로운 구속자가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는 세상의 우두머리이다. 이분이 하는 말은 예수님께서도 절대 복종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나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일이다. "너희에게는 하느님(성부, 성자, 성령)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는 말씀이 이루어졌다 하겠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황당한 주장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과연 예수님 안에 있는지 아니면 그 "다른 이(자기 이름)" 안에 있는지 솔직해 져야한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머무르고, "다른 이(자기 이름)"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이"의 가르침(말, 메세지)이 자기 안에 머무른다. 이 이름 안에 있는 이들은 은총의 힘 아래에 있지 않고 항상 죄의 힘(죄의 권세, 세상 우두머리) 아래에 결박되어 있다.
그래서 주님의 은총에 대하여 오류를 범하여 실수하기도 한다. '죄의 설침'은 알아 채지만 '은총의 내려짐'은 알아내지 못하여 말(가르침)의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만다. 다른 이가 자기 안에 있고 그(다른 이)의 말이 자기 안에 머무르면서 자기 자신을 지배하기 때문에 죄의 힘에 대한 은총의 힘에 대하여 실수를 저지르며 -진리(예수님의 말씀)의 성령-를 거스리게 되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의 예수님 처럼 성령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할 것이다.
그래도 그런 이들은 결코 회개하지 못한다. 자기 안에 "다른 이"의 말(메세지, 가르침)이 머무르기 때문이다. 진리의 성령님에 대하여 그가 아무리 말하여도 은총의 힘(사랑의 힘)에서 떨어진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자기 안에 자기가 있는지
자기 안에 다른 이가 있는지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머무르실 때, 성령님께서도 머무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신 주님의 성전이시며 '이 성전'에 성령의 주님께서 영원히 계시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성전(하느님의 성전 = 예수님)이 없다면 은총의 힘 (진리의 성령님) 아래에 있지 못하고 죄의 권세(다른 이 = 세상 우두머리) 아래에 놓여 자기 안에 예수님을 모실 자격이 없다면서 "다른 복음"(다른 이의 가르침)을 전하게 된다.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한다.
하찮은 우리 안에 진정 예수님께서 오셨기에
우리는 깨끗해 지는 것이다.
우리가 깨끗해야만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오실 수 있는게 아닌 것이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는 그"를 조심해야 한다.
"순결한 창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에우트로피우스 강해’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창녀와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그 창녀가 높이 올라갈 수 없었기에 그분께서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창녀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 여인이 술에 취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어떻게 들어가셨습니까? 벌거벗은 그 여인의 신적인 상태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창녀의 상태에 들어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창녀가 그분을 뵙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도망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에 사로잡혀 짐승처럼 되어버린 상처투성이의 여인을 발견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십니까? 그 창녀를 맞아들이십니다. 정말 그 창녀를 아내로 맞이하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무엇을 주십니까? 반지를 주십니다. 성령의 반지를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이제 그대를 내 안에 품어 그 누구도 감히 그대를 넘보지 못하게 할 것이오! 목자가 그대를 품에 안고 간다면 늑대가 다가오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그 여인이 말합니다. "하오나 저는 죄인이며 더러운 년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는 의사입니다." ... 사랑은 미친 짓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종종 추한 것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처럼 하셨습니다. 추한 여인을 보시고 미치도록 사랑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십니다. 창녀를 아내로 삼으시고 당신 딸처럼 사랑하시고 여종처럼 돌보시고 동정녀처럼 지켜주시고 정원처럼 담을 둘러주시고 당신 지체처럼 아끼시며 당신 머리처럼 돌보시고 뿌리처럼 심어주십니다. 목자처럼 그 여인을 보살피시고 신랑처럼 그 창녀를 아내로 맞으시며 제단처럼 그 여인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신랑처럼 그 여인을 아름답게 지켜주시며 신랑처럼 그 여인의 안녕을 염려합니다. 오 추한 신부를 아름답게 만드시는 신랑이시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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