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병적인 양심 - 도반 홍성남 마태오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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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유미 | 작성일2011-05-26 | 조회수645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아이가 놀다가 학교수업을 빼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 엄마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1. 패죽이거나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린다 2. 공부 안하는 놈은 밥먹을 자격도 없다고 야단치고 굶긴다. 3.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와서 저녁먹으라고 한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다른 문제 하나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어디 놀러 갔다가 깜빡 미사를 빼먹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 주 미사를 갔습니다. 그런 때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1. 삐치셔서 쳐다도 안 보신다. 2. 당신이 매달려계시던 십자가를 빼어들고 나를 패려고 내려오신다. 3. 지난 주에 빠졌으니 성체를 굶으라고 하신다. 4. 그래도 미사에 와서 반갑다고 성체를 주신다.
가끔씩 죄를 지어서 성체를 영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분들을 봅니다. 무슨 죄냐고 물으면 소소한 것들만 이야기들하십니다. 뭐 그런 것 가지고 그러시느냐 그냥 영하시라고 해도 절대로 성체를 영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 분들과 대화하다 보면 마음에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이 분들은 왜 이렇게 크지도 않은 죄를 짓고서도 성체를 영하지 못하는 것인가? 열심한 마음 때문인가? 천만 만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신앙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즉 병적인 양심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양심이란 무엇입니까? 양심적이다/ 양심없는 놈/양심수/ 양심의 가책이 된다 등등 양심이란 말은 아주 자주 사용되는 말입니다. 양심은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마음입니다. 그러면 이 양심이란 것이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양심은 사실 그 내용을 점검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양심이란 내가 가진 도덕관에 어긋난 행동을 했을 때 일어나는 감정인데 내가 가진 도덕관이 과연 건강하고 모든 사람이 다 공감하는 그런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때로는 강박적인 자기 생각을 도덕적인 것과 혼동해서 자신을 심하게 자학하는 바람에 양심이란 감정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가진 양심이 다 옳고 건강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안에서 양심의 가책이 일어날 때 내가 가진 이 양심이란 감정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리고 적절한 감정인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점검이 없다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손해보는 삶을 살게 됩니다. 병적인 양심을 가진 분들은 공격적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밥입니다. 병적인 양심을 가진 분들은 자학적인 성향이 강한데 이런 분들을 자기 밥으로 알고 비난하는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데 동네 마당청소문제로 토론을 벌이는데 어떤 아지매가 왜 사람들이 청소를 하지 않느냐 동네를 왜 사랑하지 않느냐고 소리를 지를 때, 건강한 사람이라면 너나 잘해라 너나 잘해 왜 우리한테 지랄이야 하고 콧방귀뀝니다. 그런데 병적인 양심을 가진 분들은 맞아 나는 나쁜 년이야 하고 아무도 나오지 않은 마당에서 자기 혼자 청소합니다. 이와 비슷한 손해를 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병적인 양심을 가진 분들에겐 만성피로가 따라다닙니다. 늘 쉬는 시간없이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기 바쁘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양심적인 분들을 보면 대개 어린 시절 잔소리가 심한 부모 밑에서 자란 분들입니다. 그런데 나이먹어서는 부모가 하던 잔소리가 자기 몸에 배어서 스스로에게 잔소리를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양심적인 삶은 신앙인이 지향해야할 삶입니다. 그러나 강박적인 양심, 지나친 도덕관념이나 청결벽에서 비롯된 양심이라면 그 건강성을 반드시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자신을 들볶고 주님께는 가까이 가지 못하는 서러운 삶을 살다 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보십시오. 둘째 아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가산을 탕진하고 별별 좋지 않은 짓을 다 하였습니다. 아마 집에서도 둘째 아들이 하는 짓거리를 식구들이 다 알았을 것입니다. 큰 아들이 둘째 아들에 대하여 화를 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족들의 반응이 아니라 둘째 아들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후회하였지만 자학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집이라 여기고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둘째 아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병적인 양심이 아닌, 건강한 양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평화신문 (상담코너) '아~ 어쩌나' 홍성남 마태오 신부님 'daum 도반카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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