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부활 제6주일 2011년 5월 2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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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1-05-27 | 조회수427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부활 제6주일 2011년 5월 29일 요한 14, 15-21. 지난 주일의 복음에 이어서, 오늘 복음도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명상 내용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에 대해 예수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보여주신 실천들이 그분 안에 있었던 하느님의 생명이 하신 일이었다고 믿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그 믿음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그분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들 안에 그분의 실천들이 나타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었던 하느님의 생명이, 그분의 죽음 후, 그분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의 실천 안에 확산되어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하느님은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안에 같은 실천들이 나타나게 하고, 그것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진리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또 말합니다. ‘나는 너희들을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제자들의 실천 안에 예수님이 돌아와 살아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지만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터이니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세상은 이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그분을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하면서 그분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인의 실천 안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일을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동물은 먹이를 얻어서 자기 개체를 유지하고, 또한 종족을 유지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무자비하고 포악해도 비난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약육강식의 질서 안에 삽니다. 인간도 동물의 한 종이기에 같은 질서 안에 살 수 있습니다. 어느 동물학자는 인간의 동물적 생태를 기술하면서 인간을 ‘털없는 원숭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에게 동물 본연의 질서만 있다면, 그것은 당연한 호칭입니다. 인간 사회는 법을 만들어서 인간의 동물적 약육강식과 포악함에서 인간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법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약육강식하고 포악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무자비하게 지배하고 각종 횡포를 하는 것, 서로 권력을 잡겠다고 상대를 중상하는 것, 돈 몇 푼을 위해 인색하고 사람을 기만하는 것 등은 ‘털없는 원숭이’들이 지닌 합법적 약육강식의 포악한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포악함으로 인간은 인간다워지지도 않고, 인간다운 사회가 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비록 자기 한 사람 희생하더라도 더 큰 진실을 위해 헌신할 때, 인간으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들이 있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순국선열들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고개를 숙이고 엄숙할 수밖에 없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생존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사랑도 일종의 살신성인입니다. 모든 부모가 다 하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 된 사람들의 희생이 있어서 인류역사 안에는 아름다운 인간 사랑이 지속됩니다. 인류역사 안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신앙은 하느님의 힘을 빌려 인간이 소원성취 하겠다는 약삭빠른 수작이 아닙니다. 인류역사 안에 한 번씩 나타나는, 종말에 대한 광신도(狂信徒) 집단이 주장하듯이, 신앙은 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빠져나가, 내세에 가서 잘 살겠다는 수작도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본다는 말은 예수님의 실천 안에 인간 생명의 최종적 보람을 본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 안에서 보람을 찾는 존재입니다. 재물을 많이 쌓아 놓고 보람을 느낄 수도 있고, 큰 권력을 잡아 다른 사람을 지배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 놓은 부모의 흐뭇한 보람이 있고, 제자를 아끼고 사랑해서 유능한 인재로 키워놓은 스승의 보람도 있습니다. 사업이나 자기 직장에 충실해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 느끼는 보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것 안에 삶의 보람을 심는 노력을 우리는 헌신이라 부릅니다. 하느님에게 헌신할 수도 있고, 하느님이 아끼시는 인간 생명을 위해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재물이나 권력이 헌신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헌신이 하느님의 생명을 진솔하게 산 결과였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수 있는 헌신을 모든 순간에 하신 분이었습니다. 병자를 만나면 병자를 고쳐주고, 죄인이라 소외당한 사람을 만나면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이, 우는 이, 진리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염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은 누구도 버려지거나 불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재물과 권력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헌신은 인간생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헌신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아끼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실천하신 헌신을 보면서, 그것이 그분 안에 있었던 하느님의 생명이 하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을 본받아 발생하는 모든 형태의 헌신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봅니다. 그 생명을 성령이라 부릅니다. 오늘 복음은 아버지께서 ‘다른 협조자인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셔서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협조자’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깨닫는데 먼저 예수님이 하신 역할이 있었고, 그 다음에 성령의 역할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진리의 영인 것은 헌신이 하느님 생명의 진리이고, 성령은 그 헌신의 진리가 우리 안에 발생하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자의 능력과 여건은 다릅니다.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처한 여건에서 최대의 헌신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었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다.’는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인의 삶 안에 그분이 하신 헌신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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