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6주일(요한 14,15-21) -*반영억라파엘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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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1-05-29 | 조회수390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부활 6주일(요한 14,15-21) 서로의 관계를 회복 시켜주는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그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간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일까요? 쌍방 통행일까요? 예, 좋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베풀고 또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식에게, 배우자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는데 남는 것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분은 주고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하면 상대방이 알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채워줄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수고와 땀의 보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은 일방통행이지만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죄가 있든 없던 개념하지 않으시고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오히려 죄가 클수록 은총도 넘치는 사랑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하시며 죄인이 잃었던 권위를 회복시켜주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 많은 상처를 주고 또 받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사랑의 결과입니다. 사랑을 하면서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내가 이만큼 베풀었으니 너는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느냐는 보상심리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방식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써 상대방을 소유하고 마음속에 묶어둡니다. 그래서 사랑을 빌미로 상처를 더해갑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상대의 고유성을 인정해 주고 그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자체가 보상입니다. 사랑함으로써 주어지는 기쁨과 평화, 보람이 이미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입니다. 저의 집안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큰형님께는 장남이 아들, 둘째가 딸입니다. 형과 형수님께서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아들이 장가들 때가 되니 며느리감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들에게 애인이 생기니까 마음이 흔들리셨습니다. 형님은 그저 좋으셨습니다. 이래라 저래라 하질 않으십니다. 곧 며느리가 생긴다는 것만 생각해요. 그런데 형수님은 저 놈이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하면서 서운함을 자주 표현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데,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짜증을 내셨습니다. 마침내 결혼을 하였지만 아들을 통해 며느리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며느리에게 아들을 빼앗겼다는 생각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다가 딸을 출산하였는데 둘 다 직장을 나가기 때문에 아이를 형님과 형수님이 맡게 되었습니다. 그 손녀가 누구를 따를까요? 할머니에게 안가고 꼭 할아버지께 가는 거예요. 늘 형님 등에서 잠이 들어요. 이것을 우리 어머니가 보시면 사뭇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더라고요. 도대체 에미는 뭐하고 네가 그리 업고 다니느냐고…. 이제는 딸을 결혼 시켜야 되는데 딸을 놓지 못해요. 떨어져 있지만 매일 전화하고 사사건건 ….형수님께서는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지만 자녀에게는 사사건건 잔소리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딸을 빼앗겨야 할 때가 다가옵니다. 움켜쥐지 않으면 빼앗길 것이 없어요.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소유하고 있으니까 빼앗기고서는 가슴앓이를 하게 됩니다. 때가 되면 떠나보내야 하고 떠난 놈은 부모에게 기대지 말고 스스로 서야 하는데 그것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나 봅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장가간 아들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며느리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딸은‘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불행한 여자시리즈도 있는데 불행한 여자는‘며느리를 딸로 착각하는 여자’, ‘사위를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 그중에 상태가 아주 심한 것은 ‘며느리 남편을 아직도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는 여자’랍니다. 어찌 되었든 서로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제자들이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실현됩니다. 그것은 동시에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푸신 무조건 사랑에 대한 응답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은 모두를 내 놓는 사랑입니다. 목숨까지도. 우리 옛말에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설사 자식에게 업신여김을 받아도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랑이란 내리 사랑이므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능가한다.’는 의미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는 많아도 아랫사람이 윗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윗사람이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이 전수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지 내방식의 사랑을 고집하여 상처를 키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14,21)라고 하셨습니다. 인격적인 사랑은 인격의 지성, 정서, 의지에 일치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대한 인격적 사랑은 그분의 비전과 열정에 동화될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실천하는 것입니다.‘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쁨, 예수님의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하는 가운데 평화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의 정신과 가르침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내적 진실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요구를 헤아리고 그 것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도 하나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불만하지 말고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음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주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듯 우리가 서로에게 다짐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사랑을 증거 합니다. 약속 이행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느님과의 약속 배우자간의 약속, 부모와의 약속 자녀와의 약속 그리고 이웃과의 약속에 충실한 만큼 사랑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첫 마음에로 돌아가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과 이웃의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14,18)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영을 약속해 주셨고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을 무시하고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결코 떠나 본 적이 없다.’네가 나를 원망하는 그 순간까지....... “아버지의 품 안에는 아홉 자식이 있을 곳이 있지만 아홉 자식의 어느 집에도 아버지가 있을 곳은 없다.”는 말이 크게다가옵니다. 부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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