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조금 있으면" [그리스도적 고통] | |||
---|---|---|---|---|
작성자장이수 | 작성일2011-06-02 | 조회수371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는 시간은
사실 너무나도 길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시간은 고난의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며
기쁨으로 바뀐 순간에 그 고통의 시간은 짧게 느껴진다.
여기서의 고난(고통)은
세상적인 고난을 염두에 두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고난(고통)은
그리스도적인 고난을 의미한다.
...........................................................................................................................................................
다음은 아래 인용 본문 내용 중의 일부이다.
"각자가 자기 십자가(자기 비움, 가난의 영성)를 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영적(성령적)으로 결합시켜감에 따라 점차로 고통의 구원적 의미가 그의 앞에 열리어 나타나게 됩니다. 그는 이 의미를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이라는 차원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적인 차원으로 내려오게 되며 개인 자신의 응답이 되어 자기 고통 속에서 내적인 평화와 영적인 기쁨까지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 는 것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봉사(섬기는)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의 사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이 사무쳐 있는 그런 고통(자비의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고통과 결합될 때, 구원적 능력이 승리의 길을 열어 주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은 자기 고통 (그리스도의 고통에 결합한 자기 십자가) 속에서 무한한 보화의 매우 특별한 한 조각을 간직하고 있으며 또 이 보화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교회는 구원을 위한 인간 고통의 가치에 의존합니다."
...........................................................................................................................................................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티아서 2, 19 - 20>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복음서 3, 29 - 30>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서 , '구원에 이르는 고통' 중에서 ]
사랑으로 고통을 극복하신 예수 그리스도 ( 십자가 사랑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
구원은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또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고통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을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세상에 당신 아들을 주셨습니다. "주신다"는 말씀 자체가 이 해방은 외아들 그분에 의하여 그분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 아들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이며 인간을 위한 사랑, 구원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적 고통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고통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차원은 구속의 차원입니다. 외아들 그분이 인류에게 주어진 것은 일차적으로 결정적인 악에 대항하고 결정적인 고통에 대항하여 인간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원의 사명을 띠고 보내심을 받은 하느님의 아드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악을 바로 그 뿌리에서부터 쳐부수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이 악의 뿌리들은 죄와 죽음이라는 땅 속에 뻗쳐있었습니다. 죄와 죽음은 영생을 상실하는 장본입니다. 외아들의 사명은 죄와 죽음의 정복에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인간의 고통을 구체적인 죄들의 결과로 판단하는데에는 크게 조심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고통을 인간 역사에서 개인적 행동과 사회적 과정의 죄스런 배경에서 분리시켜 놓을 수도 없습니다. 인간 고통의 근저에는 죄와의 복합적인 연루관계가 있다는 비판 기준을 배격할 수 없다는 것도 진실인 것입니다.
외아들께서는 당신 구원사업에 의하여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십니다. "영생"은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결정적인 행복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선 첫째로는 원죄와 더불어 비롯하여 악의 영향력 아래 인간의 역사 안에 뿌리를 내린 죄의 지배를 불식하시며 그 다음으로는 인간에게 성화은총 속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죄가 태초 이래로 현세의 역사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비할데 없이 드높은 사랑을 통하여 아드님을 "내어 주심"으로써 이분께서 바로 인간의 악의 뿌리 자체를 쳐부시고 인간의 고통의 세계 일체에 구원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고통의 세계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의 활동은 일차적으로 고통 속에서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분은 육신의 고통이든, 영혼의 고통이든 인간의 모든 고통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가르침을 주셨는데 8가지 행복의 선언입니다. 현세생활에서 갖가지 고통으로 시련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고통을 바로 당신 자신에게 받아들임으로써 인간 고통의 세계에 다가오심을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 오해를 받는 일을 겪으셨을 뿐아니라 점점 더 소외를 당하고 적의에 둘러싸이게 되셨으며 자기를 죽이려고 계획하는 음모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으며 죽음(십자가 사랑)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시며 이 방법으로 당신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 고통을 수단으로 하여 그분은 인간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인류 역사와 인간 영혼에 뻗어 내려 있는 악의 뿌리를 쳐부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의 구원하는 능력을 의식하면서 당신 자신의 고통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고 고난의 잔을 마시며 아버지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이 사랑 안에서 아버지께 일치되어 계셨습니다. 홀로 그분만이 아버지께 대한 일치의 사랑으로써 모든 죄의 악을 스스로 짊어지고 받아 들일 수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적 고통 속에서 죄들이 불식되고 죽음이 제거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고통이 인간 차원들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고통받는 인간 그 자신이 바로 외아들 그분 곧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하느님" 이시기에 그분만이 오로지 지상의 인류에게 실존하는 모든 죄의 총계에 내포된 악을 포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 ( 십자가 인간 안에 당신께서 살아 계신다 )
그리스도의 수난과 더불어 모든 인간 고통이 새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악의 경험이 비할데 없이 그리스도의 고통을 결정지었으면 이 그리스도의 고통이 구속의 댓가가 되었습니다. 구속자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인간 각자 모두가 구속사업이 성취되게 한 그 고통에 참여 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누구나가 자기 자신의 고통을 겪으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고통을 인간에게 열어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이 당신의 구속적인 고통 속에서 모든 인간 고통에 참여하는 분이 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발견할 때 또한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고통도 재발견하게 되어 새로운 의미로 풍부해 지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까지 이끌어간 사랑(아버지의 자비)을 알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통받고 죽으시면서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셨다 할진대 그분은 이 고통 및 죽음과 더불어 당신께서 사랑하신 사람 안에 살아계십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살아계시기에 그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 사람에게 일치되십니다. 이 일치로 말미암아 세상은 나에게 대해서 죽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에 따르는 영광은 십자가의 부활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드러납니다. 부활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들어 높여지셨음과 상응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자기 비움이다고 한다면 동시에 그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그분께서 들어 높여지셨음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명에 도달하셨고 또 완전히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 고통의 약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바로 그(부활) 하느님의 권능과 융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고통을 통하여 활동하고자 하시는 당신 원의를 확인하셨습니다. 이 약함과 자기 비움 속에서야말로 당신의 능력이 알려지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먼저 나(그리스도)를 미워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시련과 곤궁 속에서 인간은 고통 때문에 잃어버린 줄로 생각했던 '영혼'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특별한 소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하여 인간과의 결합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결합하는 이 몸 안에서 대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비단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받고 있을 뿐만아니라 또한 자기 고통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창조적 고통에 관한 진리의 절정을 이룹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구속적인 고통을 모든 인간의 고통에로 향하여 열어놓어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고 있는 한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성취하신 그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이 완전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더할나위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통하여 성취된 구속사업이 인간 각자의 고통 안에서 표현되고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계속 살아 있으며 특별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살아있고 발전하고 있으며 이 차원에서 인간 고통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결합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고통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자기 품 안에 그리스도의 고통의 신비를 안고 있습니다.
고통의 복음 (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된다 )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인류에게 고통에 관한 하나의 특별한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구속자 자신이 이 복음을 쓰신 것이니, 당신 자신의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 들임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특히 마리야말로 자기 몸으로 (이미 마음으로 그랬듯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의 필요성에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린다" 는 조건 아래에서만 수행될 수 있는 요청임을 당신 제자들 앞에 명백히 제시하셨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 참고 견디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통의 복음은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된다며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당신 때문에" 시련과 고난 속에 있는 그들과 함께 있게 되리라고 시사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 받으며 자기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통과 결합시키면 그 고통 속에는 인간을 내적으로 그리스도께 가까이 이끌어 가는 특별한 은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육신을 능가하는 영의 위대함을 확고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고통 중에서의 내적인 성숙성과 영적인 위대함은 바로 그분 자신이 당신 진리의 영을 통해 인간 고통의 한복판에서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을 바로 당신(그리스도적) 고통의 한복판을 통하여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해 들어가십니다. 무릇 고통의 변형과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밖에서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은총이 작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모든 인간 고통 안에 현존하시며, 당신 진리의 영의 능력에 의하여 그리스도적인 고통이 안으로부터 작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각 개인이 고통에 들어서게 될 때에는 거의 언제나 전형적으로 "왜" 라는 물음이 따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저 직접적으로 대답을 주시지 않으며 이 인간적인 질문에 추상적으로도 대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인간은 그 자신이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 가면서 (체험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적 대답을 실체적으로 듣게 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 십자가(자기 비움, 가난의 영성)를 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영적(성령적)으로 결합시켜감에 따라 점차로 고통의 구원적 의미가 그의 앞에 열리어 나타나게 됩니다. 그는 이 의미를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이라는 차원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적인 차원으로 내려오게 되며 개인 자신의 응답이 되어 자기 고통 속에서 내적인 평화와 영적인 기쁨까지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 는 것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봉사(섬기는)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의 사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이 사무쳐 있는 그런 고통(자비의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고통과 결합될 때, 구원적 능력이 승리의 길을 열어 주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은 자기 고통 (그리스도의 고통에 결합한 자기 십자가) 속에서 무한한 보화의 매우 특별한 한 조각을 간직하고 있으며 또 이 보화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교회는 구원을 위한 인간 고통의 가치에 의존합니다.
2007년 8월7일 / 괄호는 게시자
........................................................................................................................
그리스도의 고통( 예수님의 사랑 / 십자가의 사랑 )에 참여하는 예수님의 벗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르는" ㅡ '십자가 인간'이라 할 것입니다
성체적인 삶(자신을 내어주는 가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이시기에 죄와 죽음과 고통을 이기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 죄와 죽음과 고통을 이기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결합하여야 하는 이유는 세상적 고통과 그리스도적 고통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고통은 사랑의 고통이며 고통의 미움이 아닙니다. 사랑의 고통이란 [사랑에서 나오는 고통]을 의미하며, [고통에서 나오는 미움(분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름으로써 겪게 되어지는 그리스도의 사랑, 곧 십자가 사랑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며, 인간의 행위에 대한 고통의 미움이 아닌 것입니다. <2006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