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6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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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06-03 | 조회수319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2011년 6월 3일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순교자 기념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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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 아니 그리스도를 제거해버린 세상은 기뻐하리라는 어제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세상에 주님이 없다는 것이 기쁨이 되는 세상, 그것도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이 아닌 하느님의 백성에게 하느님이 사라진 것이 마치 해방된 것과 같은 세상의 기쁨이 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혼란스러운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법으로 살지 않는 세상이 하느님을 적대시하고 하느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 없이 산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사람들, 그것도 백성의 원로와 사제들, 스승들이 합심하여 하느님을 따르지 말아야 할 본보기로 십자가에 죽이고 기쁨을 얻었다는 것이 충격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2000년 전, 분명히 그 일이 일어났고, 그 수치스런 십자가에서 평생 사랑밖에 해 본 적이 없는 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주님을 잃은 근심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이 기쁨 속의 세상, 하느님이 없는 것이 더 좋은 하느님 백성의 무리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모두가 옳으나 그분의 말씀이 생활에 와 닿으면 그 어느 하나도 쉽지 않고 이기적인 것을 채울 가능성이 단 1%로도 없다는 것이 그분이 우리와 함께 세상에 살아서는 안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냥 무섭고 판단하시는 하느님으로 머무셔야 하고, 우리는 그분께 정성이라는 기도와 예물로 눈 막음 하며 세상 살이는 죄를 바탕으로 크기를 논하며 서로 판단하고 저울질 하며 싸움에서 이기는 것을 은총으로 말하고 싶어합니다.
참으로 참으로 그러한 세상, 지금은 어떨까요? 행복이란 단어에 모든 삶의 이유를 말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하느님은 어느 위치에 계실까요? 우리는 하느님을 믿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고,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서슴없이 말들을 하는데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우리에게 과연 그 행복을 가져다 줄까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주님은 당신을 믿고 따른 제자들이 가질 마음 상태를 "근심"이라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의미하는 바를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이 근심이 그리스도의 고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근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때 만나게 되는 상황들에 대한 걱정일 수 있습니다. 분명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단어를 품어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말은 수 없이 많이 사용하지만 그 사랑들은 거의 자신을 위한 목표나 철저히 이기적인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어서 얻고 싶어하는 행복 역시도 바로 행복해지거나 무조건 웃음으로 이어지는 갑작스런 기적과도 같은 은총일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로 보는 이들과 하느님 말씀을 바로 따르려는 이들은 이 이기적인 구조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 내가 가진 것 모두와 그 이상을 얼마나 빼앗기게 될지, 그래서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고 얼마나 많이 아파야 할 지를 두고 세상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손을 걷고 한 발 들어서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수고와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그 고통의 시간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어서 만나게 되는 삶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이미 눈에 보듯 뻔한 일들입니다. 그것이 근심입니다. 진통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이 아니라 고통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길을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로 그 길의 옳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잘못을 모두 드러내어 하느님의 참 뜻을 세상에 보여주었고, 부활은 하느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과 그 사랑을 따르는 이들의 삶이 영원한 행복의 길임을 보여주어 우리에게 구원을 알려주었습니다.
세상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사람들인 우리에게 세상은 고통이 절반이 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피하겠다고 하느님의 이름을 이야기하며 행복이란 단어로 우리를 마취시킨다면 우리는 또 다시 그 옛날 우리처럼 그리스도를 또다시,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또 다시 몇 번이고 죽여서 얻는 것에 기뻐할 지도 모릅니다.
고통을 싫어하여 무조건 성공해야 하고, 무조건 기뻐야 한다며 주님을 찾는 이 시대에 주님은 이 근심과 고통으로 이어지는 당신의 삶과 제자들의 삶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표현하십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하느님이 주시는 참 행복은 결국 무위도식으로 끝나는 인간답지 못한 자유로움이 아닙니다. 그 고통의 이유가 되는 것들에 대한 헌신과 그 과정 모두가 웃음으로 끝나는 숨이 끊어질듯한 고통과 땀방울 그래서 찡그린 얼굴에서 묻어나는 정성과 봉사와 나눔이 모두 행복입니다.
새벽 어스름에 홀로 힘겹게 눈을 떠 밥을 하는 어머니의 삶 하나에도 주님의 말씀이 들어있음을 깨닫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내일 일어날 시간을 걱정하는 근심이, 밥을 지을 때 그 수고로움으로 이어지지만 우리 모두가 그 밥상을 앞에 두고 당연한 듯 밥을 먹고 감사 없이 일어서더라도 어머니의 행복은 지켜집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란 십자가에서도 부활에서도 한결 같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연한 근심과 고통과 기쁨이 가득한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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