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6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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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06-05 | 조회수31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11년 6월 5일 주님 승천 대축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끝입니다. 28,16-20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사람들은 복음을 읽을 때 잘 정돈된 소설이나 이론서를 읽는 것 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실제 내용과 상관 없이 어떤 주제가 정해지면 흠 잡을 때 없는 진리를 대하듯 듣는 모습을 봅니다. 오늘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입니다. 승천은 주님의 수난과 부활 뒤에 오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보며 세상엔 구원의 길이 열렸고,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완전히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고작 40여일간의 시간 만을 함께 하고 떠나시려는 주님의 승천이 아쉽기만 합니다. 그렇게 사랑한 제자들을 왜 떠나셔야 하는지 지금도 주님 얼굴 한 번 보면 소원이 없겠다 하는 우리의 입장에선 이 땅에서 다시는 주님을 뵙지 못하게 공적으로 선포된 날이라서 더더욱 아쉽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광스런 승천에 어울리지 않는 복음 속의 한 문장이 있습니다. "의심"이라는 말, 주님의 모든 일이 끝나고 떠나셔야 하는데 남겨진 사람들, 그 중에서도 당신의 제자는 아직도 의심을 하고 있었노라는 말입니다. 주님에 대한 모든 것이 풀리고 모든 진리가 확실한 때 주님의 승천이 이루어져야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의 복음에 합당한 모습일텐데 복음은 단 한마디로 완전함을 무너뜨려 버립니다. 그리 놓고 살펴보면 복음에서 주님의 삶은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그분의 의도가 사람들에게 진실로 전달된 예도 그리 없었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이 진리에 가까울 때도 많았습니다. 당신이 수난을 준비할 때도 당신의 마음은 제자들을 뚫지 못했고, 말리던 제자도, 같이 죽자고 예루살렘을 향했던 제자도 십자가 수난 앞에서는 당신을 버렸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을 뽑으실 때도 기준이라는 것을 가지기에 너무 애매하고 도저히 이유를 모를 사람들을 뽑아 세우셨습니다. 심지어 죄를 짓는 이를 그 현장에서 사도로 뽑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과감함도 보이셨습니다. 그런 이들이 당신을 믿을 수 있다는 게, 따를 수 있다는게 어찌보면 신기할 따름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수양시키시지 않았습니다. 피정을 시키시거나, 교리를 가르쳐 신앙적 스승으로 만드신 일도 없습니다. 시대를 비판하고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움직일 수 없는 증거와 흠잡을데 없는 신학적 식견으로 혁파하고 제자들을 신학적 집단이나 신앙의 수호자들로 양성한 예도 없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그냥 사셨고 보여주고 말씀하신 것이 전부였습니다. 말씀이 눈 앞에 펼쳐지는 삶이 예수님의 전부였습니다. 제자들은 듣기만 했던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보지 못하고 듣기만 했던 것을 보았던 제자들, 그러나 그 결과가 십자가였음을 경험한 이들, 부활을 통해 무엇이 옳은 것인지 보기는 했으나 스승의 소생이 또 하나의 기적처럼 느꼈을지도 모를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오늘 주님과의 마지막 날 "의심"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건 그래서 별로 이상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 안에 하느님께서 제자들을 우리의 기대처럼 날선 칼날과 같은 완벽한 이들로 일시에 변화시키시지 않으셨다면 당연히 예상되는 "의심"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주님의 한결같은 마음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기억하는 결론만 내 놓고는 주님을 하늘 높이 보내버립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의심하는 이도 들었을 이 사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주님의 승천 앞에 의심을 품었던 것에 대한 의문도 풀리지 않는데, 그런 이에게 이 같은 무겁고 놀라운 사명이 주어졌다는 것은 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눈 앞에 의심하는 이에게 어떻게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았다는 분께서 하느님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명을 주실 수 있습니까? 또 그와 언제나 함께 하겠다는 이분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과 사람의 모습으로 마지막 작별의 날에 선언된 이 이야기는 주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사실 의심하는 심약하고 복잡한 심사의 사람들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도 있었고, 주님과의 삶 속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셨지 당신을 위해 뽑히고 선발된 이들 가운데 오신 것이 아니기에 복음의 끝에 위치한 이 모습은 이미 주님이 오시기 전에도 있었던 변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세상에 주님은 당신이 아버지께 들었던 모든 말씀을 살아보여주셨고 이 모든 권한에서 나오는 사명을 부족하고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제자들에게 넘겨주십니다. 이제 당신의 일이 끝나셨다는 일방적인 선언에 우리는 '아직'이라고 말하고 '조금 더'라고 청하고 싶지만 주님의 선언은 단호합니다. 주님은 "의심"하는 제자를 굳게 믿으십니다. 마음이 바뀌지도 않았는데, 바뀔거라 믿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헤아리기도 벅찬 사람을 믿는 주님의 사랑. 주님은 그렇게 맡기고 순식간에 사라지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 완전한 사람을 찾으시는 하느님이 아니시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진리를 알게 되고, 자격없는 희망을 가지며 하늘나라를 꿈꿀 수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의심"하던 이가 전해준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아직도 눈에 보이는 주님의 발현에 너무 들뜨고 그분의 발자취나 흔적을 그리고 소문난 주님의 자리를, 소리를 찾아나서는 것이 기쁨이라 생각하는 우리에게 정작 주님을 전해준 것은 우리 보다 못한 믿음을 가진 듯 보이는 주님을 직접 봤다는 그 부럽지만 괘씸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의 승천은 주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주님의 승천은 주님의 확신을 말합니다. 주님의 승천은 주님의 목적이 구원에 있음을 완전히 드러내줍니다. 누가 구원되어야 합니까? 의심하는 바로 나입니다. 그분의 사라짐과 더불어 진짜 고민이 시작되고, 진짜 기억이 시작되며 눈 앞에 펼쳐진 나의 세상에 하느님의 진리가 펼쳐집니다. 바로 나로 부터 말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한결같고 그분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의심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이젠 진짜 삶을 사십시오.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나이며 그리스도에게 들은 것도 나뿐임을 기억한다면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사는 것임을 기억하고 살아가십시오. 당신이 누구라도 사명은 당신에게 맡겨졌습니다. 오늘은 바로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그분이 가신 하늘을 보지 말고 당신의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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