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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승천 대축일 - 우리들의 귀향[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06-05 조회수440 추천수3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은 주님의 승천대축일이면서 동시에 홍보주일입니다.


비행기를 타보신 분들은 항상 느끼는 거지만 불안합니다.

‘이 쇳덩어리가 과연 나를 미국으로 데려다 줄 수 있을지, 하와이까지 나를 끌고 갈 수 있을지.... ’

큰 배가 바다에 뜨는 것은 별로 크게 신기하지 않아요.

‘뜰 수 있겠다.....’  이해가 갑니다.


그렇지만 수 백명을 태우고, 수 톤의 짐을 싣고 ,비행기 반의 무게가 연료라고 하는데 그 엄청난

연료를 싣고, 중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13시간, 14시간을 날아가는 것을 보면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가는데 참 신기합니다.


물론 이제는 하늘만이 아니라 우주여행까지도 갑니다.

그러나 옛날에 비행기도 없고 아무 기구가 없던 그 시절에도 인간은 하늘에 오를 수 있다고 믿었지요.


성서에 보면 창세기 5장 24절에

아담의 6대 후손인 에녹이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그때 에녹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늘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


열왕기 하권 2장 11절에 하느님이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태워 하늘로 데려가셨다.


토비드서 12장 20절에 라파엘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구약성서에는 특별한 선지자, 예언자들을 하느님이 무덤의 부패를 겪지 않고

하늘로 데려간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옛날 사람들이 생각할 때 하늘에는 하느님과 천사와 성인들이 사는 곳이라 생각했고

지하에는 마귀와 악마들이 산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논리적인 사건으로만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듯이

렇게만 이해해서는 안 될 겁니다.


성서에 보면 제자들이 '하늘 너머로 사라지는 주님을 쳐다보았다..' 라고 나오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승천의 의미보다는 어떻게 오르셨을까?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오르셨을까?

아니면 바람에 날려서 올라가셨을까?

우리 앞에서 마치 새가 없어지듯이 없어지셨을까?

대기권 밖에 나가서는 산소호흡기를 쓰셨을까?

오만 잡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련 최초의 우주비행사 가가린이 지구 궤도 저 위에 올랐을 때 관측소를 향해서

“야, 여기 하늘나라에 올라와 보았더니 하느님이 없다!”

라고  첫 번째 전보를 보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공산주의자들인 관측소 직원들은 손뼉을 치면서

“거 봐, 신이 어디 있어...통쾌하고 시원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을 모르는 무식한 말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어느 공간 안에 어느 시간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이 계신 것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상태이겠지요.

그래서 주님의 승천대축일을 지내면서 승천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말고

잘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주님의 승천의 의미는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귀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귀향이라고 그럽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나자렛이 아니라 성부가 계신 천상하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으로 귀향을 하신 겁니다.


귀향이라고 하면 우리들에게 영적인 귀향도 해당이 됩니다.

잃어버린 모상을 되찾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귀향입니다.


미움 덩어리의 삶으로 살던 사람이 사랑의 삶으로 변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승천의 의미, 귀향입니다.

늘 불안과 두려움에 기쁨의 삶을 못 살던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아 평화를 찾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귀향입니다.

질투와 분노 속에 살던 사람들이 관용과 용서를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귀향입니다.


잃어버린 하느님의 모상을 찾아가는 것이 귀향이라고 그랬습니다.

고백소에 들어가서 성사를 볼 때마다 죄 덩어리 인간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아름다운 인간으로 변화되는 것이 귀향입니다.


두 번째는 파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대신할 협조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내가 육신을 지닌 몸뚱아리로는 영원히 너희와 같이 있을 수 없기에 

나는 가지만 나를 대신해서 너희를 도와 줄 협조자 성령을 보내겠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무엇으로 보여집니까?

미사 때마다 사제의 강론을 통해서 성령을 느낍니다.

성체를 통해서 우리는 성령을 느낍니다.

주변에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을 보고

‘아,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시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얼마 전에 자녀 때문에 무척 마음고생을 하는 자매님이 와서

‘주님은 자기를 버린 것 같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너무나도 서운함이 컸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느 생애 어느 한 순간에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갓난아기가 아장아장 걸을 때는 엄마가 아이의 걸음마를 가르치기 위해서 아이 뒤에서

옷을 잡고 아이를 걷게 하다가 슬그머니 옷을 놓습니다.

아이는 엄마가 뒤에 옷을 잡고 있는 줄 알고 아장아장 걷다가 엄마의

인기척이 없으면 아이의 다리가 떨리고 넘어지려고 합니다.

그때 엄마는 문지방 뒤에 숨어서 아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내 새끼가 넘어지면 언제라도 슬라이딩을 해서 새끼를 잡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의 숨결을 못 느낀다고 해서,

하느님이 내 곁을 떠나신 적은 없습니다.


앞에서 빛이 강하게 내리쪼이면 뒤에 그림자는 짙어집니다.

내가 지금 고통의 한 가운데 시련 속에 벼랑 끝에 서 있는 어둠의 한 가운데 서 있다고 하는 것은

다른 어느 때보다 주님의 은총의 빛이 앞에서 비추이고 있다는 그 뜻일 겁니다.


못난 인간들은 어둠 바깥쪽에서 쏟아지는 은총의 빛은 못 보고

시커먼 것만 보면서 일 년 열 두달 징징시리즈로 삽니다.


하느님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해도 우리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적어도 우리가 지옥의 문턱을 넘어서기 전까지는

하느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계시기에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만 먹으면 됩니다.

그분을 찾으면 그 분은 보여주시고 그분을 부르면 대답해 주십니다.

우리들이 하느님을 향해서 걸어갈 때 그 분은 뛰어서 오시고

우리가 그분을 향해 뛰어갈 때 그분은 우리들에게 날아서 오십니다.

장소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만나주십니다.


늘 이따가 기도해야지~

나중에 모든 것이 평화로워지면 그때 기도해야지~

지금은 복잡하니까 기도할 시간이 아니야~

지금은 세상 일이 너무 바쁘니까 나중에 때가 되면

지금 내가 성당 안 다녀도 하느님 잊어버린 적 없어.....

나중에 늙어서 한가하면 그때 성당에 나가야지~~


많은 분들이 기도하는 것과 걱정하는 것의 차이를 구분을 못합니다.

걱정하는 것을 기도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걱정하면 마귀가 치고 들어오지요.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도는 지금 바로 해야 됩니다.

미사 중에 기도해야 됩니다.

매 순간순간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봉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성지를 걸어 다니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기도가 되어, 장미송이가 되어 성모님께 바쳐져야 합니다.


어떤 형제가 예수님을 한 번만 만났으면 좋겠다~ 하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했지만

늙어죽을 때까지 그 꿈은 실현되지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도 않았고 사랑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형제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병자성사를 받을 때 신부님께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한평생 하느님을 만나고자 했지만 이 나이 먹을 때까지 주님은 내 앞에 나타나신 적이 없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 한 마디 건네신 적이 없습니다. 너무 너무 속상합니다.”

고해 신부님은 뭐라고 그랬느냐!

평생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 사셨으면서도 왜 하느님을 못 보셨다고 하십니까?

'자, 여기 예수님 만나십시오.'

하면서 성체를 입에 넣어주는 바로 그 순간 그 형제는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한평생을 성체를 영하면서도 그저 신자니까~ 그냥 세례 받았으니까~

미사 시간 내내 분심 중에 있다가 옆 사람 일어날 때 따라서 일어나서

성체를 받으러 나오면서도 왜 나오는지조차 의식을 못하고 혓바닥 위에 성체가 올라가는 것조차

의식을 못하고 그저 미사 끝나면 튀어나갈 생각부터 먼저 하니

그런 사람에게 성체를 통해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 세상 어디에 가서도 하느님을 못 만날 겁니다.

사제가 ‘그리스도의 몸!’ 하면 여러분들은 '아멘!'

이 뜻은 뭡니까?

‘자 주님 들어가십니다. 영접하십시오. 주님 당신 만나러 지금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뼈와 살을 가진 그 모습으로 우리 앞에 존재하시지는 않지만,

특별한 방법으로 앞으로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 앞에 계십니다.


특별히 사제의 입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계십니다.

순례 오신 분들은 이 성지에 발을 들여놓는 그 순간부터 하느님을 만나고 성모님을 만나고 계십니다.

잠시 후에 사제의 손과 입술을 통해서 축성된 주님의 몸을 영하시게 됩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꿈도 꿔보지 못할 축복을 미사 때마다 받고 있고

개신교 신자들은 상상도 못하는 못할 축복을 미사 때마다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고

그것도 모자라 성체를 영하는 즉시 바로 내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이 사십니다.'

여러분들이 성체를 영하는 그 순간 여러분의 손은 여러분의 손이 아니기에

성체를 영하고 자리에 들어가면 성가 부르실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손을 가지고 여러분 스스로가 치유기도 하셔야 됩니다.

영이 아픈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대고 치유기도 하십시오.

육신이 병든  사람은 그 예수님의 손을 가지고  아픈데 손을 대고 치유기도하십시오.

믿는 대로 될 겁니다.

미사 끝나고 예수님의 손을 그대로 모시고 가서 집에 환자가 있거나 아이들에게 안수를 주십시오.

미사가 끝나고 집에 갈 때까지도 내 손은 내 손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성체를 영한 거룩한 입술, 예수님의 손으로 변한 내 이손을 마귀들은 다시 세속의

손으로 변화시키려고 집요하게 장난을 합니다.

성체 영한 그 입술 성체의 그 감각이 혀끝에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당 벗어나면서부터

남을 원망하고, 중상하고, 모략하고, 입에서 분노하고, 미워하는 말이 나오게 만들고,

예수님의 손을 가지고 늘 남에게 손가락질 하게 만듭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오늘 특별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시는 예수님, 성모님의 현존을 느끼는

거룩한 미시와 순례가 되도록 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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