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주님 승천 대축일 2011년 6월 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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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1-06-05 | 조회수556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주님 승천 대축일 2011년 6월 5일
마태 28, 16-20, 사도 1, 1-11.
오늘 우리가 들은 것은 마태오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셨고,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분부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복음서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 하느님에게 가셨다고 말하는 양식은 각각 다릅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40일 후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 앞에서 하늘로 오르시고,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고 흰옷을 입은 사람 둘이 나타나서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고 말합니다.
루가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가 사도행전도 기록하였습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당일 베타니아 근처에서 승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오늘 우리가 들은 대로 승천이 부활 40일 후에 올리브 산에서 있었다고 말합니다. 같은 공동체가 기록하면서 두 문서에서 승천의 때와 장소를 달리 말합니다. 그렇다면, 승천에 대한 기록들은 정확한 사실을 보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느님에게로 가셨다는 사실을 다양하게 알리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그들의 믿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는 승천 사실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갈릴래아에 있는 산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셨고, 그들과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신다고만 보도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이 부활 후 40일이 지난 다음에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부활 후 어느 기간이 지나고,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시작한 사실을 반영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말은 부활로 영광스러워진 예수님이 그 영광의 빛으로 교회 안에 군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떠나가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일들을 회상하면서 그들의 기억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회상하여 기억하는 일들 안에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살아계셨습니다. 제자들이 회상하며 알려주는 그분의 말씀과 삶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발생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알린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었습니다. 부활하신 분의 영광과 권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말은 그분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상하며 그분의 영광을 탐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천사의 입을 빌려 말하였습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 하늘을 우러러 상상하며 하늘에서 주어지는 혜택을 바라고 기다리는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천사는 말합니다.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부활하여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하느님에게로 가신 예수님은 그런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 안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분에게 묻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제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의 숙원을 이루시는 일입니다. 오늘도 신앙인들은 흔히. 예수님 덕분에 우리의 소원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 실현은 현실적 삶을 외면하고 초현실적 기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초현실적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고 용서하는 아버지의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셨고, 그것 때문에 유대교 실세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교회 위에 지도자로 군림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당신에 대한 기억을 제자들 안에 남기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기억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분이 하신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 위에 행세하지 않으시며, 사람들 위에 군림할 인물을 남기지도 않으셨습니다. 승천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떠나셨다고 말합니다. 다만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제자들의 기억 안에 돌아오시고 그들의 실천 안에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이 보여준 하느님의 일은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고치고 살리면서 하느님의 생명을 철저히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복장을 달리하고 그들에게 명령하지 않으셨고, 하느님을 배경으로 당신의 영광이나 위엄을 찾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인간의 자유가 소중하였습니다. 그분은 자유롭게 섬길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자녀의 삶입니다.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람은 다양함을 아끼고, 위험과 고통을 감수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위험과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사랑은 자유를 존중하고 위험과 고통을 각오하고 감수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 요한복음서(15,9)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합니다. 하느님이 인간 위에 군림하지 않으시듯이, 부활하신 예수님도 군림하지 않으신다는 승천의 메시지입니다. 교회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군림하겠다는 사람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사도행전이 지적하듯이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는’ 우를 범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시야에서 잃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심부름꾼이 스스로 훌륭한 지도자로 군림하려하면, 지도자는 보여도 전하는 메시지는 사라지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사람들에게 일리기 위해 있는 교회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했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같은 복음서는 다른 곳에서 말합니다.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25,40). 예수님은 우리의 이런 실천들 안에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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