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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령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공동체" - 6.12,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1-06-12 조회수371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1.6.12 주일 성령 강림 대축일

사도2,1-11 1코린12,3ㄴ-7.12-13 요한20,19-23

 

 

 

 

"성령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공동체"

 

 

 

지난 주일의 주님 승천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성령을 충만히 주시고자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끊

임없이 성령을 받아야 살 수 있는 공동생활입니다.

 

피정 오는 분들에게 자주 확인하고 말씀드리는 내용이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사는 것이 어려워요 쉬워요.”

“어려워요.”

“맞습니다. 잘 살고 못 살고는 차후 문제이고,

  어려워도 끝까지 살아냈다는 자체로 구원입니다.

  수도생활의 어려움도 함께 사는 것이요,

  함께 사는 자체가 수도요 수행입니다.”

 

설명하면 모두가 공감합니다.

 

수도원 잔디밭의 풀 뽑기를 포기하며 써 놓은 글이 있습니다.

-잔디 밭

 뽑고 뽑아도

 무수히

 돋아나는 온갖 풀들

 함께 어울려 살자는

 아우성-

 

사람 뿐 아니라 자연도 함께 살아가는 공존공생의 이치를 보여줍니다.

다양한 초목들이 어울려 조화된 모습은

그대로 ‘화이부동(和而不同;서로 다르되 잘 어울리기)의

이상적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어느 교수님의 칼럼 내용 마지막 절규와도 같은 구절이 생각납니다.

‘잘 어울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상이 온다.

 어울려 살기! 이후 죽기 살기로 절실한 과제가 될 것이다.’

 

잘 어울려 살라고 공동체에 내려주시는 주님의 얼인 성령입니다.

‘어울림’과 ‘얼’이 란 말마디가 서로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얼’을 사전에서 찾아봤더니 ‘넋, 정신, 혼’이라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얼빠진 사람, 넋 나간 사람, 혼 없는 사람,

모두 성령 결핍된 사람을 일컫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 비로소 넋도 정신도 혼도 살아남을 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성령과 공동체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 깨닫습니다.

 

하여 강론 주제는 '성령과 화이부동의 공동체'입니다.

 

성령의 은총이 화이부동의 공동체를 만듭니다.

 

 

 

성령 충만할 때 소통과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소통과 생명입니다.

불통의 죽음에 성령이 임할 때 소통의 생명입니다.

요즘 널리 회자되고 있는 주제가 소통입니다.

참 어렵고도 중요한 게 소통입니다.

 

구약의 창세기에서 교만으로 쌓아올리던 바벨탑의 좌절과 더불어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바로 불통의 인간현실을 상징합니다(창세11,1-9).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이런 불통의 인류 공동체가 오늘 성령 강림을 통해

완전 소통의 인류공동체가 됨을 오늘 사도행전은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님의 성령이 온 집안을 가득 채우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 앉아 완전 소통의 현실이 펼쳐집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은가?”

 

제자들의 말을 다 각기 자기 언어로 알아듣고 있다는 것은

완전 화이부동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다 달라도 서로 통하기에 편안하고 자유롭습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은총, 성령의 기적입니다.

 

성령 충만한 공동체일 때 저절로 소통이요 생명 충만한 공동체입니다.

불통의 죽음과 같은 동이불화(同而不和)의 공동체에 성령이 임할 때

화이부동의 생명 충만한 공동체입니다.

바벨탑이 무너진 그 자리에 새롭게 세워진

성령 충만한 우리 교회공동체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평화와 기쁨의 공동체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평화와 기쁨입니다.

성령의 꽃자리에 주렁주렁 맺어 있는 일곱 열매들이

사랑, 기쁨, 평화, 선행, 진리, 온유, 절제입니다.

성령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임할 때 불통의 벽은 소통의 문이 되어버립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지만

주님은 이들 한 가운데 서시며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이래서 함께 모여 기도하고 미사 해야 합니다.

 

1독서 사도행전에서 보다시피

오순절이 되어 사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이 임했고,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문을 모두 잠가 놓고 기도할 때

주님께서 그들 한 가운데로 임재 하셨습니다.

 

바로 그 똑같은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한 가운데 서시며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말씀과 동시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심으로

바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확인시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습니다.

바로 똑같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에게도

당신을 보여주시고 기쁨을 선사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중심이신 주님으로부터,

우리 삶의 오아시스와 같은 미사로부터

끊임없이 샘솟는 평화와 기쁨이 화이부동의 공동체를 만들어주고

살 맛 나는 인생이 되게 합니다.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와 기쁨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용서와 일치의 공동체입니다.

 

용서와 일치 또한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복수는 찬미와 감사이며

원수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 합니다.

 

어렵고 힘들수록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진짜 신앙이요 축복이고

어렵고 힘든 사람이라도 끊임없이 용서할 때 역시 축복입니다.

 

악마의 유혹은 다른 게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를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요

이웃에 대한 용서를 포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가, 이웃에 용서가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합니다.

용서해야 나도 살고 너도 삽니다.

살기위해 용서요 용서해야 화이부동의 일치의 공동체입니다.

 

창세기에서 숨을 불어넣으시며 사람을 만드신 주님은

역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복음의 제자들에게처럼

우리 모두에게도 성령을 불어넣으시며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성령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성령을 통해 주님께로부터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이 용서 받은 은총으로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용서를 통해 비로소 일치의 공동체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의 공동체의 회복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명쾌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각 사람에게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성령께 받는 은사이기에 받은 은사에 자랑 할 분은 성령뿐입니다.

성령의 선물인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여

화이부동의 한 몸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은 용서뿐입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서로 용서할 때

지체간의 원활한 소통으로 한 몸의 일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용서와 일치의 선물이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를 이루어줍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

마라나타 대신 우리는 ‘오소서 성령님’ 하고

함께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를 봉헌 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소통과 생명, 평화와 기쁨, 용서와 일치의 성령의 선물로

화이부동의 공동체를 이루어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주님은 우리 모두 당신 평화의 사람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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