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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613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6-13 조회수294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6월 13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기념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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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이 말은 오늘 복음에서 새롭게 고쳐질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느님의 백성의 삶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가르침은 이 정직한 삶을 모두 고쳐야만 하는 숙제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을 새로 고쳐주지 않으셨으면 세세한 예로 들었던 이야기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우리는 항상 악인에게 맞서야하고, 오른뺨을 치는 이에게 막아서거나 되갚아주어야 하며, 재판에서 늘 이여야 하고, 청하는 이에게는 항상 우위에 서서 셈을 하고 들어줄 지 물리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가르침을 빼고나면 당시 예수님의 눈에 본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부분이 주님의 가르침 때문에 틀린 것이 되고, 고쳐져야 하는 삶의 방식이 됩니다. 


문제는 이 이야기 속의 내용이 우리의 삶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투사적인 정신으로 항상 악인에게 맞서 이겨야 한다, 그보다는 더 강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삽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그에 걸맞는 복수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송사에서도 우리는 이겨야 하고, 청하는 이가 조르고 매달리는 모습이 한 없이 낮아보이고 비굴해보여야 그 때 비로소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입니다. 그것은 청을 들어주는 자의 권리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을 들어서라도 이런 삶을 살고자 합니다. 때로 이것을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기도하고 정성을 드리기도 합니다. 모든 것 위에서 침해받지 않는 삶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기는 일까지 빈번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뒤집게 하십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얻는 것이란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당장은 물론이고, 미래에도 가진 것을 내어 놓기에 더 궁핍해지고, 더 비참해지며, 더 어려워지는 삶이 보입니다. 손해보는 삶이 눈에 보이는 것을 주님은 실천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더 좋은 미래가 있다. 더 은총을 받는다 식의 약속이 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럴수가 없습니다. 내가 남에게 해 주는 이 좋은 일로 세상을 사는 우리는 이미 불공평해져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내 것이었던 것이 다른 사람에게 가 있다면, 그것도 내가 그에게 주었다면 이미 나는 그에게서 뒤쳐져있게 됩니다. 

주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신다고 말들을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잃었으니 사실 그것은 투자라고 보기도 힘이 듭니다. 눈에 보이는 내 것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남에게 가서 그가 나보다 당장은 낳으니 말입니다. 


이 세상은 더 가진자가 승리합니다.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때로 적당한 악도 필요합니다. 달라고도 해야 합니다. 적당히 사정에 따라 빼앗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삶의 방식입니다. 세상이 세워놓은 이 같은 공식에 그것을 제발로 내어 놓고 물러서는 사람이란 한참 어리석은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주님의 말씀은 정확히 이 어리석음을 향해 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가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면, 우리는 바로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뭐가 생깁니까? 세상을 몰라도 한참을 모른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우리는 세상에서 이기고 싶어하며 하느님의 힘을 빌리려 듭니다. 그것이 마치 하느님의 승리라고까지 둘러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책 속에, 역사 속에 덮어두더라도 주님의 입에서 나온 이 말씀을 없다고는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분명 다시 세워지는 이 법 앞에 2천년을 흔들리며 거절한 사람들의 역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며 하느님의 이름을 팔았던 그들의 역사를 계속하고 있는 셈입니다. 비판을 하기에 모두가 고집스레 이 말에 수긍조차 하지 않는 상황에 절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순간에 이해되고 저절로 실천되는 가르침입니다. 이 복음의 새로운 가르침을 세상을 하느님의 눈과 마음으로 품어 살아가는 사람에겐 극기나 희생이 아닌 당연하고 자연스런 행동이요 노력일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세상에 누가 그렇게 사는가?'라고 대답하는 사람들, 그들도 사랑하는 사람에겐 그 바보같은 행동을 제한적이나마 행복하게 하고 있음을 이야기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그 정도는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버티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을 주기 전에 이미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악함을 버리고, 이기심을 버리고,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지니면 이 모든 것이 저절로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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