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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삼위일체 대축일 2011년 6월 19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6-17 조회수413 추천수5 반대(0) 신고

삼위일체 대축일 2011년 6월 19일

 

요한 3, 16-18. 탈출 34, 4-6, 8-9.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이 한 분이신데 위(位)는 세 위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하느님의 신비를 있는 그대로 담아 전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4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일어난 신학자들의 논쟁의 결과로 신앙 언어 안에 나타나 통용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구약성서에도 신약성서에도 없습니다. 어느 한 시기에 하느님에 대한 말이 왜곡되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학자들이 만들어 사용한 단어입니다. 그리스철학에 물든 옛날 신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하느님과 어떤 관계 안에 있는지를 알아듣기 위해 고심하고, 논쟁한 결과 사용되기 시작한 삼위일체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런 논쟁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상호 관계를 알아듣기 위해 삼위일체라는 옛날의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모세로부터 비롯된 유대교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은,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탈출기가 말하듯이, ‘자비하고 너그러운...자애와 진실이 충만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함께 계시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너그러우심, 자애와 진실을 실천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나타난 율법은 그 실천을 위해 도움을 주는 그 시대의 지침이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예수라는 분이 출현하였습니다.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제물봉헌에 충실한 사람만 하느님이 아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고, 제물 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도 하느님은 그 함께 계심에서 제외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기를 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아 믿으시는 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 주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분의 그런 실천이 그들의 믿음과 달랐기에, 그들의 권위를 훼손하는 행동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실천한 것이었기에,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부활이고 승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모인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당신의 삶으로 보여 주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들도 실천하면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당신 안에 되살려 놓으시고, 신앙인들 안에도 예수님의 도전과 실천이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셨듯이, 신앙인들의 도전과 실천에도 하느님은 그 숨결로 살아 계셨습니다. 그 하느님의 숨결을 성령이라 부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되, 예수님이 하신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그 숨결로, 곧 생명으로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신 것은 인류역사 안에 있는 무자비와 단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는 모세로 말미암아 전해진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율법 준수만을 강조하며,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는 사람을 하느님이 단죄하고 무자비하게 벌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로마 총독의 힘을 빌려 예수님을 죽여 없앤 것은 인류역사에 끊임없이 있었던 무자비와 단죄를 그들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인류는 무자비하였습니다. 자비와 사랑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역사 안에 발생하는 자비와 사랑의 도전들 안에는 하느님이 그 생명의 숨결로 살아계십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성령이십니다. 그 생명을 투명하게 실천하며 사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신앙인들이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충만히 사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은 그 생명의 아버지로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실천하는 자비와 사랑의 기원이십니다. 이제 하느님을 예배할 장소는 그 시대 사마리아인들이 주장하듯이 갈릴래아의 산도 아니고, 유대인들이 주장하듯이 예루살렘의 성전도 아닙니다. 요한복음서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예배하는 이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합니다.”(4, 24). 하느님의 숨결이신 영과 예수님이 실천하여 보여주신 진리, 곧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참다운 예배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은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인류역사 안에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셔서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인간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그 생명의 아버지로 살아계십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하느님이 역사 안에 세 개의 이름을 남기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먼저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자비와 사랑의 원천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은 예수라는 한 사람의 삶 안에 당신의 자비와 사랑이 어떤 실천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 자비와 사랑을 배워 역사 안에 새로운 도전과 실천을 합니다. 그 도전과 실천 안에 하느님은 숨결, 곧 성령으로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과 관련되어 주어진 이름은 이렇게 세 개입니다. 그 이름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하느님은 자비와 사랑의 원천이시고, 예수님은 그 자비와 사랑을 실제 살아 보여주셨으며, 성령은 그 자비와 사랑의 숨결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령은 그 구원이 우리 안에 실현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다음으로 높은 분이 아니고, 성령은 기적을 행하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하는 ‘협조자’(요한 14, 16)들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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