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무욕과 은둔으로 가는 석양 무렵의 뜨거운 여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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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지요하 | 작성일2011-06-17 | 조회수34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계간 <화백문학> 제44호 (2011년 여름호)
산문 - 나의 삶, 나의 인생(20매) 무욕과 은둔으로 가는 석양 무렵의 뜨거운 여정 지요하 (소설가) 1982년에 등단이라는 것을 했으니, 문단 경력이 30년 정도 되는 것 같다. 34세,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을 했다.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문예지 <소설문학> 신인상을 양손에 쥐고 문단에 올라서 조금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촉망받는 ‘신인 그룹’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후회되는 점이 있다. 고향을 박차고 이른바 ‘중앙’으로 진출하여 효과적으로 자기방어를 하면서 철저히 창작활동에만 매진했더라면 내 문학의 성과와 위상이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고향을 탈출하지 못했다. 고장에서 완전히 노출이 된 상태로, 자기방어라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하면서 오만가지 일과들을 껴안고 밖으로 나도는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그리하여 덧없이 세월을 잃었다. 언젠가 어떤 평론가가 나에 대해 재미있는 말을 했다. “작가 지요하는 출중한 자질에도 불구하고 작가로서 대성할 수 없는 요인들을 안고 있다. 장남으로 태어난 것,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천주교 신자로 사는 것, 이 세 가지 요인 때문에 그는 평범한 작가로 머물고 말 것이다.”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처음에는 너그럽게 웃으면서도 오기를 품었다. 나를 제약하는 그 세 가지 요인을 안고서도, 그 제약들을 멋지게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말겠다는 전의(戰意)를 스스로 불태웠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평론가의 예견이 맞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승복의 뼈아픔을 감수한다. 그러나 뼈아프지만은 않다. 승복과 체념 속에는 이상한 ‘여유’도 있는 법임을 자각한다. **** 1981년 고향(충남 태안)에서 <흙빛문학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83년 <흙빛문학> 제1호를 발간했다. <흙빛문학>이 온전히 자리를 잡은 상태가 되었을 때 회장의 짐을 벗었다. <흙빛문학>은 충남에서는 조치원의 <백수문학>에 이어 두 번째로 뿌리를 내리고 지령을 쌓아가는 지역문예지가 되었다. <흙빛문학> 출현 이후 자극을 받아 여러 지역에서 문예지들이 출간되었다. 하나같이 지역의 명물이나 지명을 제호로 사용했다. 그런 현상에서 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흙빛’이라는 명칭은 내가 창안한 것이지만, 내 고장 ‘태안’을 상징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문학적으로는 뜻이 있고 질감도 좋지만 고장을 풍미하는 이름은 아니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더욱이 1989년 태안군이 복군(復郡)되면서 <흙빛문학>은 서산과 태안, 두 고장을 포괄하는 성격을 띠게 되어, 내 고장 태안은 고유의 문학지가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태안문학> 창간은 내게 절실한 사안이 되었다. 나는 1994년 일단 <흙빛문학>를 떠났다. 대뜸 <태안문학>을 만들면 불필요한 오해들도 생겨날 것을 염려하여 몇 년 동안 공백기를 두었다가 1998년 <태안문학회>를 창립하고 <태안문학>을 창간했다. 그리고 2003년에는 한국문인협회 태안지부를 창립하고 초대 지부장을 맡았다. <태안문학>을 1년에 두 번씩 10집까지 발간하여 온전히 뿌리를 내린 상태에서 초대 회장의 짐을 벗었다. 2003년 회장의 짐을 벗을 때는 매년 두 번씩의 발간 경비 외로 별도 조성한 후원회비 적립금 3천1백만 원을 새 집행부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2007년에는 문협 초대 지부장 짐을 벗는 대신 한국예총 태안지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의 짐을 지게 되었는데, 예총 초대 지회장 짐도 올해(2011년) 초 벗게 되어 한갓진 상태가 되었다. 내겐 1993년부터 등에 지고 온 또 하나의 짐이 남아 있다. <충남소설가협회> 회장이라는 짐이다. 1993년 3월 창립과 동시에 초대 회장의 짐을 지게 되었는데, 어언 18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 짐을 벗지 못하고 있다. 그 짐을 넘겨받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1년에 한 번씩 <소설충청>을 발간하여 올해 제19호를 만들게 되는데, 내년 20호까지만 회장 짐을 유지할 생각이지만 내 뜻이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나는 지방에서 살면서 <흙빛문학>과 <태안문학>, <소설충청> 등 3개의 지역문학지를 창간한 셈이다. 여기에 <태안예술>이라는 예술지도 창간했다. 1991년에는 서산에서 <갯마을>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5년 동안 편집인 겸 편집주간 노릇을 했고, 또 1993년에는 역시 서산에서 <한겨레신문>을 모방한 시민주식에 의한 주간지 <새너울신문> 창간에 참여하여 5년 동안 논설주간 노릇을 했는데, 지역 언론과 지방정신문화 쪽으로는 일정 부분 기여를 한 셈이겠지만, 내 창작활동을 놓고 보면 정력낭비라는 측면이 없지 않을 것 같다. 실속이야 있건 없건 ‘고향을 지키는 작가’라는 별칭도 얻고 지역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공으로 이런저런 상을 여러 개 받았다. 충남의 최고상인 ‘도문화상’도 받았고, 대전일보사에서 주는 ‘대일비호대상’도 받았다. 모두 고장 밖에서 받은 상들이다. 부끄럽게도 아직 고장에서 주는 상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 언젠가 타지의 어떤 지인이 문예지에 소개된 내 약력을 보고 내게 질의를 한 적이 있다. “선생님은 상복이 있으신지 큰 상들을 많이 받으셨더군요. 그런데 고장의 이름으로 주어진 상은 약력 상에 소개되지 않았더군요. 받은 상이 없어서인지, 고장에서 주는 상은 약력에 올릴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서 그러신 건지 궁금합니다.” 그 질의에 나는 간단명료한 답변을 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법이랍니다.” 예수님조차도 고향에서 대접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내게 묘한 위안이 되는 것 같다. **** 따지고 보면 오랜 동안의 방황이었다. 오로지 창작 활동에만 전력투구해도 부족할 판에 고장에서 너무 오래 시간 쓰고 돈 쓰고 고생하는 일을 했다. <흙빛문학>도, <태안문학>도, <소설충청>도, <태안예술>도 내 애정과 사명감의 소산이긴 하지만, 내 희생과 손실의 실체이기도 한 셈이다. 또 <갯마을>과 <새너울>은 내 인생 실패의 어떤 증좌가 될 법도 하다. 이제 <소설충청>만을 제외하고는 그 모든 일들에서 손을 떼었다.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더라도 ‘책임’을 벗게 된 것은 그대로 해방감을 갖게 한다. 지금은 매우 홀가분하고 한갓진 마음이다. 안온한 상태로 이제로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무욕의 경지에서 은둔 생활을 계획하고 있다. 오랜 꿈을 드디어 실현할 수 있는 시기로 접어든 것이다. 어느덧 인생의 영마루, 60대 초반의 세월로 접어들었으니, 유유자적하는 삶은 내게 참으로 긴요하다. 그런데 나는 요즘에도 몸을 움직이는 일이 많다. 특히 매주 월요일 오후에는 서울을 간다. 지난해 11월 29일 이후 계속되고 있는 일이다. 지난 2월의 설 명절 전에 단 한 번 빠졌을 뿐이다. 내가 매주 월요일 서울에 가는 이유는 저녁 7시 30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거행되는 천주교 ‘월요 시국기도회(거리미사)’에 참례하기 위해서다. 그 ‘거리미사’의 지향은 ‘4대강 댐 헐어내서 모든 강에 생명을! 남북화해 되살려서 온 누리에 평화를! 민주정부 수립해서 만민에게 인권을!’이다. 그 세 가지 지향은 내 가슴에 지속적으로 뜨거운 불을 지핀다. 나는 지성인 중의 한 부류인 문학인으로서 ‘시대의 참다운 증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 ‘뜨거운 정의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하느님 신앙’을 최고 지표로 삼는다. 바로 그것들을 위해, 그 세 가지 마음을 안고 지속적으로 월요일마다 서울 여의도 ‘거리미사’에 가는 것이다. 이제 그 일은 내 인생 후반기에서 가장 중요한 행동사항이 되었고, 내 가치관을 실체적으로 표징하는 일이 되었다. 종착역이 어디이고 언제쯤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앞으로도 계속 그 길을 갈 것이다. 무욕과 은둔으로 가는 석양 무렵의 뜨거운 여정이기에…! <약력> 충남 태안 출생.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소설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흙빛문학>, <태안문학>, <소설충청> 창간. 충남도문화상, 황희문학상 등 수상. 저서로 장편소설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등 다수. 현재 충남소설가협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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