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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619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6-19 조회수325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6월 19일 삼위일체대축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18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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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말은 우리에겐 아주 흔한 말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에 익숙한 우리는 이 말이 가지는 실제 의미와 느낌을 가지기 전에 누군가 전해주고 가르쳐주고 모든 것에 앞서 해두는 공지사항 정도로만 이 말을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정작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때 우리는 하느님께 대해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밖으로 드러내곤 합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실제 느낌은 상이나 벌, 심판이 거의 전부입니다. 상이라고 하면 내세의 영원한 삶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우리가 바라고 느끼는 상은 현실에서 잘 사는가, 못 사는가 정도입니다. 현실에서 좋은 일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고 무엇인가 잘못되었을 때 우리를 하느님이 벌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반적입니다. 그런 표현들을 별 생각도 없이 서로에게 자주 사용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지만 그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은 별로 없으리라 말도 합니다.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 가야 하지만 확률은 높아보지질 않습니다. 그저 실낱같은 희망을 두고 보험든다 생각처럼 영원한 생명이나 구원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주님은 세상을 구원하셨다는데 실제 그 구원의 길은 나 혼자서도 벅찬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또 기도할 땐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나는 구원받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하느님은 완벽히 심판의 기준에 서 계신 분입니다. 이런 분에게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리 어울리지 않습니다. 좋게 말해봐야 어린 아이들이 딱히 자랑할 말 없을 때 쓴다는 '그래도 근본은 선한 분이시다'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분에게 무슨 사랑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복음의 시작은 이렇게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여기에서 "나머지"라는 표현이 모든 상황을 다시 설명합니다. 나머지란 말은 "때문에"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그리 생각하는 것은 우리 삶이 누가보든 개인적인 행복과 불행을 기준으로 좋고, 나쁜 것으로 나눠지고 행복은 상으로, 불행은 벌로 느껴지는 세상 살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을 받기위해, 아니면 벌을 피하기 위해 살아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살벌한 세상에서 살기가 더 힘들어질 때 우리는 그나마 하느님께 벌을 피하는 것이 유일한 대책인 듯 살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사랑이란 단어를 꺼낼 입장도 못되는 삶을 사는 셈입니다. 우리가 봐도 세상이 이런데 하느님이 무슨 이유로 사랑하시겠습니까? 그냥 단칼에 의인과 악인을 골라내고 의인 중에 의인을 골라내신다라고 표현한다면 간단하고 쉬울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생각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나머지"라는 단어는 이 모든 상황을 하느님 앞에서 돌려놓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때문에 우리가 아는 심판의 잣대가 아닌 전혀 다른 방법으로 대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심판의 칼날 대신에 외아들이 주어집니다. 외아들에게 그 심판을 맡겼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아들을 믿는가에 따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외아들은 상벌의 도구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그리고 줄곧 심판 대신 우리에게 가르침을 말과 행동 모두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느끼는 실제 이미지는 이 때 이미 바뀌었습니다. 하느님은 심판대신 아버지의 뜻을 너무나 잘 아는 외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느님이 정말 바라시는 삶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아들은 심판의 권한을 가지고 있으나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람은 하나도 잃고 싶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니"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려하시는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담긴 "구원"의 뜻이고,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그렇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기름을 부어 세우신 사람이란 뜻입니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판받은 일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누군가를 상과 벌로 대하신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이 세상의 일그러진 모든 법칙과 삶을 비틀듯 사시며 그 삶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사람들마다에게 참 삶의 의미를 알려주시고, 함께 해 주시고, 함께 사셨습니다. 세상에 우리가 만든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그리스도에게서는 찾을 수 없으며 그분에게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삶, 곧 구원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 구원의 잣대를 우리 식대로 벌주고 없애려 했으나 부활은 그것을 되돌려놓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유일한 삶이라는 것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상벌로 대하시기에 "너무나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 마음이 세상에 외아들을 통해 보여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성령을 통해 그 아드님을 기억하고, 그 아드님의 함께 하심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신 분들의 사랑하시는 마음 속에 우리는 이미 상이나 벌이 아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복음의 끝자락은 이렇게 장식됩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유일한 뜻을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이 벌 주시기 전에 이미 심판 받았다는 말씀과 더불어 주신 이 말씀은 하느님의 진심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들, 그러나 하느님이 정말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입으로 믿고 생각으로 두려워하며 삶으로 어기는 삶을 반복한다면 여전히 우리에게 하느님은 언제 벌을 줄 것인지 시간을 재고 계시는 엄하고 두렵고 잔혹한 심판자이실 뿐입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멸망에서 구하시려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려 심판을 거두고 구원을 주신 아드님, 그리고 그 아드님에 대한 기억 속에서 우리 스스로 하느님을 닮은 거룩함을 찾게 도와주시는 성령. 이 거룩하신 삼위에서 느껴지는 단어는 "사랑"입니다. 

완전하신 하느님, 거룩하신 하느님께 자격도 없고 볼품도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느님이시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랑 안에는 모든 것이 아직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구원으로 돌려세운 "나머지"라는 말 하나에 감동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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