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 오시는 하느님" - 6.19,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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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1-06-19 | 조회수323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2011.6.19 주일 삼위일체 대축일 탈출34,ㄱㄷ-6.8-9 2코린13,11-13 요한3,16-18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 오시는 하느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죽어있는 화석과 같은 삼위일체 하느님 교리가 아니라, 온 누리가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다는 체험적 신앙고백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지난 주 성령강림 대축일과 이번 주 삼위일체 대축일 사이에 저와 저희 수도공동체는 하느님께 참 좋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저의 선물은 동시에 수도공동체의 선물이기에 저의 기쁨은 동시에 공동체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제 30여년 수도생활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마침 올 해는 제 수도서원 25주년 은경축을 맞는 해이기에 그대로 하느님께서 저와 제 수도공동체에 주시는 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혀 계획에 없었던 예기치 않은 선물이라 기쁨 역시 큽니다.
얼핏 책의 표지를 봤을 때 솔직히 실망이었습니다. 저의 주름살 많은 노인 같은 얼굴에 전체 분위기도 산만해 보였고 품위와 무게가 없이 웬 지 가볍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볼수록 친근감이 있고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한 눈에 가득 들어오고 한 손에 딱 잡히는 참 뿌듯한 느낌이었고 내용 역시 팜프렛에 소개된 그대로였습니다.
“읽고만 있어도 마음이 환하고 편안해지는 행복 메시지!”
책의 표지와 책 내용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게 정원의 요즘 드높은 벚나무였습니다. 까맣게 익어가고 있는 버찌들인데 도저히 높아서 따 먹을 수가 없으니 보기만 할 뿐입니다. 얼마 전 화장실 앞 높이 달린 빨갛게 익은 버찌를 보기만 할 뿐 따먹지 못한 안타까움이 또 연상되었습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 속담대신 ‘따먹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는 말마디가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즉시 저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묵상했습니다.
우리 삼위일체 하느님은 결코 나무 높이 열매를 달고 있는 그런 분이 절대 아닙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 같이 고답적인 분도 아니고 따먹지 못하도록 높이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 같은 분도 아닙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손에 닿을 수 있는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분입니다.
마치 제 출간된 책이 마치 이런 나무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 모두의 눈높이에 맞춰 오시어 누구나 손에 닿을 수 있고 따먹을 수 있는 사랑의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고백은 바로 우리 모두의 눈높이에 맞춰 오신 사랑과 겸손의 하느님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 오시는 사랑과 겸손의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우십니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십니다. 모세에게 친히 이렇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께서 오늘은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개방이요 전능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자신을 활짝 개방하신 사랑과 겸손의 하느님이시오, 자유자재 우리 모두의 눈높이에 맞춰 어느 사람에게는 성부 아버지로, 어느 사람에게는 성자 예수님으로, 또 어느 분에게는 성령으로 나타나시는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마술적인 전능이 아니라 사랑의 전능이요 기적입니다. 그러니 누구나 손에 닿아 사랑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살아있는 나무 같은 분이 우리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찾아 어디 찾아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 손만 내밀면 사랑의 열매들 가득 달고 있는 하느님 나무가 있습니다.
신학공부 많이 해서도 아니고 수도원에 살아서도 아닌 내 삶의 자리 손에 닿을 수 있는 사랑 나무 같은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성부를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도 있고 성자를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도 있고 성령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니 하느님의 우리 눈높이에 맞춘 사랑의 배려가 참 놀랍고 고맙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마음의 눈만 열리면 지금 여기서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은 바로 공동체 하느님을 뜻합니다.
사랑으로 하나이면서 셋인 삼위일체 공동체 하느님이십니다. 셋으로 역할이 분담되어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느님 한 분입니다. 사랑은 추상 개념이 아니라 관계 개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얼마나 깊은 사랑의 관계로 하나 되어 있는지… 하여 삼위일체 하느님은 믿는 이들 공동체의 모델입니다.
혼자 살면 누구를 사랑합니까? 공동체 내에서 사랑 관계를 떠난 하느님 체험은 애당초 불가능하며 있다면 환상입니다.
지옥은 장소가 아닌 관계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도 공동체와 고립 단절된 관계의 삶이라면 거기가 바로 지옥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체험은 유별난 것이 아닙니다.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형제들을, 자연을, 동식물을 많이 사랑할수록 더불어 깊어지는 하느님 체험이요 하늘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제 어느 수도형제로부터 ‘소통과 공존의 철학’이란 좋은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철학뿐만 아니라 신학, 문학, 교육, 정치,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또 모든 공동체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가 소통과 공존입니다. 소통과 공존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다음 사도 바오로의 권고가 고맙습니다.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 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 갈 때 소통과 공존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소통과 공존의 모범이 바로 우리 공동체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신 삼위일체 공동체 하느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사랑하듯 우리도 서로 사랑할 때 소통과 공존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실현됩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성령 안에서 성자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 아버지께 가는 여정 중에 있는 우리 삶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삼위일체 하느님,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오늘 탈출기에서 주님의 계시에 민첩하게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간청하는 모세입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 순종할 때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에게 순종하십니다. 순종하는 모세에게 하느님 역시 순종하는 자세로 늘 모세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서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 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실 것을 예고합니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관심사는 심판이 아니라 모두의 구원입니다.
심판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벌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아 자초하는 화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버리면 버렸지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늘 우리 곁에 있어도 주님을 몰라보기에 우리를 짝사랑하시는 외로운 주님이십니다.
목요 만찬 미사 복음도 생각납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깨달아 믿어 만나면 구원이고 그렇지 못하면 심판입니다.
이 거룩한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시간, 주님은 고맙게도 우리 모두의 눈높이에 맞춰 오시어 똑같이 사랑의 열매, 당신 몸의 성체를 나눠주십니다.
이어 사랑의 소통과 공존으로 삼위일체 공동체 하느님을 닮은 일치의 공동체로 만들어 주십니다.
하여 우리들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 늘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아무쪼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서 가장 짧고 좋고 중요한 기도 영광송으로 우리 전 존재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각인하며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합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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