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6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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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06-22 | 조회수32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11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거짓 예언자가 누구일까요? 예수님이 돌아가신 2천년 전이라면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이 거짓 예언자가 누구인가란 문제는 참 난감한 숙제입니다.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라면 우리는 지금 그 일에 매진하는 무수한 성직자와 봉사자들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누가 거짓 예언자일까요? 만약 2천년 전에 이 구분이 끝나고 정리되었다면 다행이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거짓 예언자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우선 그들의 차림새는 양의 옷차림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접근을 합니다. 겉으로 보아선 아무런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양의 옷차림이니 드러내놓고 선함으로 무장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같은 양떼 무리 속이라면 구분이 전혀 안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네는 개걸 든 이리들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배가 고픈 이들, 또한 바로 그 양들이 목표인 이리들이 거짓 예언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구분이 안되는 이 이리들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면 우선 그들보다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불안함이 있습니다. 생전 처음 듣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두고 맞다 틀리다를 논한다는 것은 그들의 입장이나 신분이 아니라면 짐작 수준으로 취급받기 일쑤입니다. 게다가 그렇다면 교만함이라는 공격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상식을 들이대기에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은 이미 상식 밖의 분이시라 한계는 여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보다 그들의 열매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맺은 열매는 결코 나무의 근본과 다를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선하신 하느님, 좋으신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을 전하는 이는 입으로만 사는 이가 아니라 그의 삶이 그 말씀의 결과를 보여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는 그 삶의 열매를 보아야 우리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자, 여기까지는 이해하기도 쉽고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2천년 전에는 십자가를 기준으로 제대로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2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참 겁이 납니다. 거짓 예언자가 누군지 볼 수 있는 것도 너무나 없고, 보아도 말하는데 두려움이 앞섭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열매로 보아도 되는가? 판단조차 어렵습니다. 잘못 얘기하면 무조건 생각없다 말하고, 당치않은 비판이라 말하고, 잘 모른다고 말하고, 혹시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위협조차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많이 비뚤어지게 보지 않더라도 종교가 세상에 대해 말을 건네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 말은 종교 영역 안에 있는 사람이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일종의 한계가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세상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인용하고 허용하고 인정하는 선에서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건 이야기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거나 그렇게 세상의 흐름을 용인하고 부합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흘러가는 모습은 꼭 하느님의 뜻과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서로가 이기적인 행복을 쫓아사는 세상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는 그 이야기의 폭을 종교, 성당 안에서만으로 국한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신자는 하느님을 믿으며 세상을 삽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성당을 다닌다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실천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성당 안에서 뜻풀이나 책읽기 식으로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복음대에서, 방송에서, 강의 자리에서 외치는 소리가 성당과 십자가의 테두리 밖에서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는 그저 성당 다니는 사람들 안에서만 지켜야 하는 이야기라면 이 예언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고작 교리에 대한 무지함을 깨뜨리는 정도의 탄성과 반성, 그리고 신자들끼리의 수준차이라는 말도 안되는 구분이 생기고, 모든 것을 영성의 부족함만으로 돌리며 정작 세상에서는 하느님의 사람은 무조건 이기고 승리해야 하는 삶을 살아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는, 그러고도 이유도 없이 내 탓이오라고 말하는 것이 겸손과 도덕적인 표시처럼 되어 있는 가르침이라면 열매는 열릴 수도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냥 떡하니 바라봐도 여기에서 한 걸음을 못나가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과연 거짓 예언자를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예언자를 성직자로 보았을 때, 그들의 열매가 혹시나 미사를 얼마나 정성껏 바치는가? 성사를 얼마나 성실히 주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누가 말을 잘하는가? 누가 감동적인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가? 그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가 열매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열매는 삶을 말합니다. 그가 사랑한 사람들과 그 사랑한 사람들이 그를 통해 하느님을 믿어서 이룬 삶들이 그 열매입니다. 예언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에 그 열매는 하느님 말씀을 통한 결과를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성당에 열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보며 과연 우리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할 수 있는지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이 비딱한 이야기를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마움 속에 거짓 예언자가 아닌 이분만은 참 예언자라고 생각하고 싶은 분들을 떠올릴 거라 생각합니다. 딱 그정도가 지금 안심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사람이라 불리는 이들이 이처럼 많은 세상에서도 참 예언자가 나타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드는 것은 왠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열매 하나 거두지 못한 인생이라서 그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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