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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627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6-26 조회수298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6월 27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8-2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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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은 삶의 길잡이요, 변하지 않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보면 모든 이들이 다 그런 생각을 가진 것 같진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께서 우리 중에 누군가를 특별한 기준으로 선발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만 봉헌하고자 하는 이들도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온전히 하느님의 뜻대로 간다고 믿기도 하고 바라기도 하며 두 손모아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모습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내용인 듯 보입니다. 


율법학자, 그는 예수님께 따르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평생 하느님의 뜻을 찾고 공부하고 가르치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선언은 예수님에게서 그 진리를 보았다는 긍정적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게 돌아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이 말씀이 예수님의 가난한 처지를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율법학자의 어딜가시든 따르겠다는 말씀에 대한 대답이라면 이 말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는 말씀은 하느님을 믿고 따를 것을 가르치는 율법학자에게 정작 하느님의 나라 이스라엘에 하느님의 뜻이 통하는, 그야말로 하느님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믿는다 말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이해되는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등장하는 제자의 이야기는 이 이야기를 있는 바로 그 현장에서 보여주는 듯 보입니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예수님의 모진 이야기로 들리는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현실의 삶을 항상 분리해서 생활하는 우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너무나 극단적입니다. 부모의 장례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인가? 하느님과 부모 중 선택을 하라는 이야기인가? 라는 입장에서 생각을 하면 이는 고민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부모의 장례는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치러야겠지요.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것이 부모에게 도리를 하는 것과 달리 생각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면 가족도 없다는 식의 사고는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삶에서 하느님의 뜻이란 우선 순위가 아니라 모든 삶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것과 사람의 것을 나누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느님을 따른다는 식의 사고 방식은 사실 주님의 말씀과 같은 허무함을 전해주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명을 주신 분이라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우리의 삶의 끝에 하느님께 봉헌된다고 이야기하는 우리로서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면서도 하느님의 뜻과 삶을 분리해서 우리에게 당연히 중요한 일들을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정작 주님은 머리 두실 곳도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을 다해서 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터전을 찾고 나부터 편하고 행복하고 건강하고 사랑해야 하느님의 일도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잘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 저를 받아주십시오. 아니면 주님께서 뽑아 세우신 거룩한 일을 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고 정작 주님께서는 전혀 머물지 못하는 곳을 만들어 놓은 상황을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보여주신 듯 느껴집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에도 이 특별하다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그 어디든 간다고 말하고서 자기 자리, 자기 도리, 자기 할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주님의 일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듯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신 곳 어디에도 하느님이 머무실 곳, 곧 사랑이 흘러 넘치는 곳이 없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주님은 언제나 사람들의 놀라움 속에 처음보는 사랑을 마치 구경거리처럼 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학자, 그는 아마도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실제로 하고 있는 예수님에게서 진리라는 것을 처음 발견한 듯 보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따라가면 되겠다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따라갈 곳에서 그는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베푸시는 사랑은 그가 가르치고도 살지도, 살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버림받는 죄인들의 세상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따르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아버지의 영원한 삶에 연결됨을 모르고 주님을 떠나 장례를 치르겠다는 하느님을 전혀 모르는 듯 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율법학자의 모습이 하느님의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깨달음이 아니길 바랍니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거닐으신다면 이제는 머리 둘 곳이 있을까요? 그 숱한 이들이 주님 뜻을 따르겠다고 나온 이 세상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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