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정주와 믿음" - 6.28,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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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1-06-28 | 조회수368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2011.6.28 화요일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130-200) 기념일 창세19,15-29 마태8,23-27
"정주와 믿음"
오늘 역시 ‘정주(stability)’의 영성에 대해 나눕니다. “성 이레네오는 평화라는 그의 이름대로 교회에 평화를 확립하고 그 평화를 위해 용감히 투쟁하였도다.”
아침기도 즈카리야 후렴처럼 성 이레네오는 주님 안에 정주한 ‘평화의 사람’이었고, 평생 ‘평화의 무기’로 영적전쟁에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영적전쟁에 평화보다 더 좋은 무기도 없습니다.
“주님의 나의 힘, 내 기쁨이시도다.” 아침 성무일도 독서 후 계응송에서 처럼, 주님 안에 정주할 때 샘솟는 힘이요 기쁨이요, 하여 주님의 힘으로, 주님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정주의 사람들입니다. 광주대교구 옥현진 시몬 보좌 주교님 역시 주님 안에 정주를 소망하여 사목표어를 ‘내 안에 머물러라.’라는 성구를 택했습니다.
정주의 깊이에서 주님을 만나고 성인들을 만납니다. 마태복음 서두에 ‘다윗의 자손이자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는 구절에서 보다시피,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아브라함과 예수님은 진정 정주의 대가로 정주의 깊이에서 늘 하느님과 함께 사셨던 분입니다. 정주의 깊이와 함께 가는 믿음의 깊이임을 봅니다.
오늘 창세기를 보면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었음을 봅니다. 어제 ‘의인 열 명이 있다면’ 으로 질문을 끝낸 아브라함은 아마 이런 현실이 두려웠었는지도 모릅니다. 롯이 멸망에서 구원된 것도 그가 의인이어서가 아닌 아브라함 덕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들판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롯이 살고 있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롯을 그 멸망의 한 가운데에서 내보내 주셨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하느님 안에 깊이 정주했던 의인은 아브라함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놀라운 도전이여 자극입니다. 과연 오늘날 이 세상에는 의인 몇 명이나 있을까 묻게 됩니다. 의인이 없다고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주님 안에 깊이 정주하는 의인이 되어야겠다는 분발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전날 주님 안에 깊이 정주하여 간절히 기도하던 아브라함이 그 기도에 자리에서 멸망으로 초토화된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볼 때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겠는 지요.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가 주님 앞에 서 있던 곳으로 가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들판의 온 땅을 내려다보니, 마치 가마에서 나는 연기처럼 그 땅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원자폭탄이 투하 된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또한 하느님 안에 깊이 정주한 ‘정주의 대가’ ‘믿음의 사람’임이 들어납니다. 큰 풍랑에 혼비백산한 제자들과는 달리 하느님 안에 깊은 내적평화를 누리며 수면 중인 주님이십니다.
“그 때 호수에는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중심이신 주님 안에 머물렀더라면 제자들 역시 이렇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중심을 잃을 때 배가 전복되듯 제자들은 중심이신 주님을 모시고도 주님의 중심을 잃어버려 두려움과 불안에 빠져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제자들은 물론 믿음 약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 같습니다. 주님 안에 정주의 뿌리 깊을수록 좋은 믿음입니다. 정주의 힘은 믿음의 힘이자 바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하느님 안에 깊이 정주한 주님의 영향력으로 호수는 즉시 고요해졌습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정주의 깊이에서 하느님과 일치되어 사신 예수님이심을 감지한 제자들임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의 풍랑을 고요케 하시고 당신 안에 깊이 정주한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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