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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629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6-28 조회수322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3-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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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셨다. 요한 복음이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들어서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2천년 전 실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세상을 사실 때 그분을 어떻게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느꼈는지는 무척 흥미롭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아, 혹은 하느님의 예언자 중 한 사람이라고들 말한다고 대답합니다. 

적어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며 하느님이 보내신 분으로 느끼고는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이 예언자들의 훌륭함을 논하기 전에 그 시기에 보기 힘든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들은 훌륭한 예언자라고 모두 불리지만 실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다 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전하는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달리 말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몰랐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예수님을 알기에 그분은 세례자 요한처럼 잘 알려진 사연을 가진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언들은 '저 분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라는 데서 출발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누군지도 모르는 그렇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사는 특이한 사람이라는 말도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 안에 살고 계시며 전해서가 아니라 직접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유명한 예언자들을 대하듯 듣기는 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되 그 말씀의 진심보다 그분의 능력에 더 눈길을 두고 대했습니다. 


그 틈에 예수님은 말씀을 돌려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 그 중에 주님께 관심조차 두지 않다가 당신의 길을 따르게 된 제자 베드로는 별다른 고민 없이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은 주님께 대한 신학적 연구나 반성, 관찰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저 주님과 함께 지낸 제자, 그가 주님을 따르며 느낀 것에 대한 증언입니다.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우리에게 여기 예수 그리스도는 당연한 성자이시지만 베드로의 고백이 있는 이 자리는 그저 느끼는 것에 대한 즉흥적이고 솔직한 대답입니다. 

그런데 그 고백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는다 고백하면서도 이 세상의 삶에서는 하느님은 죽은 듯 느끼며 살았습니다. 죽어서 벌 받지 않는 것이 그들이 결국 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항상 세상의 화려한 삶을 쫓으며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에서는 피하거나 숨거나 공공연히 어겨갈 방법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이들의 삶에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예수님의 삶은 하느님의 거룩함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뜻은 있는 그대로 이 아들의 삶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삶을 만나는 모든 이들은 사랑으로 구원을 얻었고, 그 구원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약속의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모습이었으며, 그분은 그렇게 우리에게 선악이 아닌 구원을 이야기하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분께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베드로의 마음이 열린 것이고 눈이 뜨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고백을 축복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은 것은 그가 훌륭히 대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의 진실을 보았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보며 그는 그리스도의 진심을 읽었고, 그리스도가 그토록 원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예수님을 통해 알고 하느님의 심판이 아닌 구원의 사랑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깨달은 것을 저승의 세력도 빼앗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 온전히 전해진 하느님의 진리는 그 어떤 두려움과 유혹과 죄가 덮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십니다. 



우리는 이 열쇠를 두고 베드로의 성품이나 자격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올라간 듯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이 일이 있은 후에 베드로는 주님을 살기 위해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주 걸려넘어지고 사탄으로까지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그는 교황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자신의 행동에 실수를 하고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주님이 그에게 부활후에 물으셨던 것은 '사랑' 이었습니다. 그는 죄인이며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잘못을 했음에도 그 사랑은 변함이 없고, 이미 그 사랑을 주님이 알고 계신다는 증언을 합니다. 



우리를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가려진 출생 만큼이나 아무것도 내세울 것도 알려진 것도 없어서 당신이 보내신 예언자들의 이름에 비교되는 우리 주님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알아듣는 베드로이기에 그의 모든 부족함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바로 아는 것은 어떤 유혹에도, 어떤 잘못에도, 어떤 부족함에도 흠이 나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빗대어 하느님의 진심을 외면하거나 지울 수 있다고, 상관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의 이 고백과 주님의 선언은 큰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있습니까? 그럼 그 아는 것을 모른 척 하지 맙시다. 그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살아간다면 그 하루가 구원이 무엇인지 보여줄 것입니다. 



베드로, 우리의 반석은 모진 바람에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지금 여기에 있게 했습니다. 그 풍파와 어려움, 때로 스스로 잘못한 부족함이 있음에도 이 바위가 사라지지 않은 것은 주님이 보호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럼에도 주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의 희망이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오늘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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