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6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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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06-29 | 조회수34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11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 앞에 중풍 병자가 놓여집니다. 오늘의 사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중풍에 걸린 사람을 사람들이 데려 왔습니다. 그들의 청은 들것에 누운 사람이나 들것을 들고 온 사람들이나 하나입니다. 그들은 낳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에 이 중풍병자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신 예수님께 환호하게 됩니다. 그분은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증명해보이셨다고 말입니다. 주님 앞에 중풍병자는 그렇게 이 기적의 수혜자가 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열광하며 복음을 닫습니다. 예수님께 의심을 품고 모독했던 사람들의 생각을 주님이 물리치셨다고 말하며 말입니다.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끝이 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시 이러한 기적을 보기 위해 동분서주 하게 될지 모릅니다. 아픈 이를 치유의 은사가 있는 곳으로 이끄는 그리고 그곳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목격하는 것에 몰두하고 심취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수많은 곳에서 이같은 은총을 찾는 이들이 밤을 새워 기도하고, 그곳이 어느 곳이든 몰려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또한 이 같은 하느님의 능력을 받은 이들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가려하고 은총의 자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와서 보시오!'라는 문구 아래 모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보고 싶었는데 보게 되었으니 좋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기적을 몸소 체험했으니 더 기쁘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이렇게 좋은 결론으로 보기에 몇가지 이상한 점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 중풍병자를 보시고 처음부터 일으켜 세우지 않으십니다. 또한 당신께 의심을 품는 이들을 망신시키려고 일부러 하셨다고 보기에도 이 기적의 과정은 그리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냥 "일어서라" 하셔도 될 일인데 오늘 따라 주님은 좀 다르게 보입니다. 복음을 따라 갑니다. 예수님이 눈 앞에 누워있는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 말입니다. 다른 복음에서 익숙하듯 그를 살리기 위해 지붕까지 벗겨낸 이들의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셨다는 그들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일까요? 아니면 그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었을까요? 분명 예수님은 그를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 믿었기에 그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셨다는 그 믿음은 꼭 주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에 '용서'로 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중풍병자에게 주신 말씀 말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용기를 내어라"는 말씀에 이어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씀을 하신 데에는 그를 지켜주었던 사람들의 사랑이 배경이 되어 있습니다.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 그들은 주님의 능력을 생각하기 이전 중풍병자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습니다. 멀쩡하던 사람도 병에 걸리면 하느님께 받은 벌이나 그 이유를 따져묻던 사람들이 한 사람을 고쳐주기 위해 길을 나섰다는 것은 주님께만, 하느님께만 희망을 걸고 발걸음을 하는 식의 신앙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들은 이 사람을 위해 그 수고의 길을 걸었고 예수님 앞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사랑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랑 받는 이에게 죄란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병자에게 가졌던 단죄가 이 중풍병자에겐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병이 낳고 안 낳고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에게 하신 가장 중요한 말씀은 이 용서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바로 그와 그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사랑, 곧 그들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예수님의 용서에 대해 아주 단호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여전히 뒤틀려진 몸의 중풍병자에게 하느님의 벌이라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전혀 꺽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병자는 여전히 죄인이며, 그 병이 낳기 전에는 그들은 벌받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이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 이야기를 곡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주님은 그를 낳게 해 주셨을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은 분명 죄의 용서와 일어나 걸어가는 기적을 분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 더 쉬운가를 물으십니다. 기적을 기대하는 우리에게 이 질문은 정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뻔한 정답이 있어도 우리는 결코 그 쉬운 정답을 말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정답을 이미 말씀하셨음에도 우리는 그가 일어나는 기적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미 그 답을 하셨습니다. 정답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입니다. 힘겨워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기적이라는 것이 일어나 그를 일으키고 걷게 하고, 보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 말하며 그것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증거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정작 하셨던 진심은 중풍병자에게 너는 사랑받고 있으니 결코 그 힘겨움이 죄가 아님을 알고 용기를 내라는 이야기셨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그의 병에도 불구하고 삶의 가치가 있고 하느님의 벌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건은 흐르고 우린 그가 일어나 걸어간 것을 여전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한 번 더 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이 기적의 주님께 환호하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군중들처럼 하고 있지만 이것이 과연 올바로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이 사건의 결론을 설명하는 이 두 문장을 봅시다.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집니까? 그가 사람들에게 받은 그 사랑이 우리의 기억 속에는 있습니까? 주님은 그가 받은 사랑에 그에게 율법학자 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의 죄의 용서를 하셨음에도 우리는 그가 일어난 것에만 관심을 쏟고 그는 잊어 버립니다. 사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를 일으키신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우리의 사랑을 보시고 인정하시지만 우리는 주님의 능력만을 보고 그분께 집중합니다. 그분이 정말 보고 싶어 하셨던 것은 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한탄 속에 이루어진 이 기적이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줍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아주 어릴 때, 세상에 수많은 장애인들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 저 사람들도 함께 살았다면 모두 고쳐졌을까? 참 아깝다... 그러나 그들과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오늘 복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의심을 품는 우리의 이기적인 모습에 주님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지... 집으로 걸어서 돌아가는 그들을 군중을 오래 지켜보지 않습니다. 그들이 보고 싶은 것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두 손에 지켜주고 싶은 사람의 들 것이 들려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힘겨워 하는 인생하나를 구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우리 안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것, 그 속에 죄는 사라집니다. 우리에겐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기쁨, 곧 천국의 삶이 이미 닿아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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