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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14주일 2011년 7월 3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01 조회수376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제14주일 2011년 7월 3일

 

마태 11, 25-30.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실망한 제자들은 흩어져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이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예루살렘으로 차차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함께 회상하면서 그분이 그들에게 남긴 말씀들을 실천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실천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자들이 중심이 된 공동체의 수는 늘어나고,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회상도 다양해졌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회상한 바를 글로 남겼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가진 복음서들입니다. 그 기록들은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 보도가 아닙니다. 부활하여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그들 안에서 말씀하신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는 그들이 기억해 낸 예수님의 정확한 말씀들이 있고, 또한 자기들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깨닫고, 믿게 된 말씀들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기도로 소개되었지만, 사실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들이 바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의 지혜와 슬기의 산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분 안에 하느님이 일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죄를 용서하신 것은 모두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당국은 예수님 안에 그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분을 거짓 예언자라 믿고 죽였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믿음은 모세와 더불어 시작하였습니다. 그 믿음을 중심으로 시작한 유대교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율사들은 율법 준수를 절대화하고, 사제들은 제물 봉헌을 절대화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기원에 있었던 믿음을 왜곡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지혜가 없거나, 그들이 슬기롭지 못하여,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제사의례를 절대화한 나머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하느님을 잊으면서 그들은 율법과 제사를 빙자하여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지혜는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외면하게 하였고,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제물 봉헌은 사람이 노력하여 얻은 산물(産物)을 먼저 하느님의 시선 아래 갖다 놓는 행위입니다. 그들은 맏자식, 농사 수확의 맏물, 사육하는 동물의 맏배 등, 자기들이 얻은 맏물을 먼저 하느님 앞에 가져와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봉헌된 것은 하느님이 가져가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 바치면, 하느님의 시선이 그 위에 내려오고, 그때부터 사람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가 얻은 것을 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시선은 인간의 이기적 시선을 교정해 줍니다. 따라서 제물 봉헌은 사람을 나눔으로 초대하고, 그 나눔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행위가 됩니다.

 

율사들은 인간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게 하기 위해, 그들의 지식과 지혜를 동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상황을 가상(假想)하여 지켜야 하는 행동 지침을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율법 조항은 많아지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도 많아졌습니다. 사제들은 성전에 많이 바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많이 바치면, 많은 축복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주장은 우리의 인과응보(因果應報) 관행을 동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의 관행을 하느님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이 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와 슬기로움은 하느님을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상상하는 하느님이지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자비하신 하느님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혜롭고, 슬기롭기를 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지혜와 슬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우리의 지혜와 슬기의 산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철부지들’을 언급하였습니다. 하느님이 그런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철부지’는 어린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입니다...어린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마르 10, 14-15). 예수님은 이렇게 철부지 어린이를 하느님의 나라와 연결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물론 어린이와 같이 유치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의 지혜와 슬기에 의존하여 하느님을 상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는 부모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는 부모의 말을 듣고 따르며 부모로부터 배워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서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결심이 담긴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신앙인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 곧 자비와 용서를 배워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지혜와 슬기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 지혜의 산물도 아니고, 우리가 슬기롭게 행동하여 감동시킬 수 있는 하느님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많이 바쳐서, 많은 대가를 얻어내는 대상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생명을 배우고, 그 생명이 자기의 삶 안에 살아있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계시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기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단편적으로만 실천합니다. 우리는 어쩌다 한 번씩 이웃을 돕고 사랑하며 용서합니다. 오늘 복음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는 말씀으로 끝맺었습니다. 지혜와 슬기를 위해 ‘수고하고 짐을 진’ 우리는 예수님이 열어주신 하느님 나라의 실천을 배워 살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과 욕심을 벗어나는 자비의 길이고, 이웃을 돕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온유하고 겸손한 길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보다 자유롭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해주는 구원의 길이기도 합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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