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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월3일 야곱의 우물- 마태 10,17-22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03 조회수361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20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가 믿음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깊은 지식을 허락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마태오복음 10장은 파견설교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말씀은 복음 선포에 따르는 박해를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제자들의 직무이자 권리로서 백 배의 상급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지만 (19, 29 참조) 죽음에까지 이르는 박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며 (10, 16),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17ㄱ절) 하고 경고하십니다. 조심하는 것은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제자들을 해치려는 사람의 손안에 들지 않도록 분별력과 지혜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조심해야 할 사람은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일까요 ? 의회는 회당에서 판결을 내리고 체벌까지 할 수 있었던 회당의 유지로 구성된 유다인들의 지방법정입니다.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7ㄴ절) 라는 말씀은 동족에 의한 고발로써, 조심해야 할 사람은 회당에서 함께 기도를 하던 친구 · 친지 · 이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복음 선포를 하는 제자들이 일차적으로 동족의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암시로서 시편 55, 13 – 15를 생각나게 합니다. “원수가 나를 모욕했다면 참아주었을 것을,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맞서왔다면 비켜나 숨었을 것을. 그러나 너였도다, 내 동배, 내 동무, 내 친구, 정다웁게 서로 사귀던 너, 축제의 모임에서 주님의 집을 함께 거닐던 너였도다.” (최민순 역)
 
복음 선포로 인한 박해는 동족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총독’  들 또는 로마제국이 임명한 지방 ‘임금’  들 앞에 끌려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받는 이방인들의 박해로 확대됩니다. (18절) 뿐만 아니라 박해는 더욱 모질어지는데, “형제가 형제를 … 아버지가 자식을 … 자식이 부모를 거슬러 죽게” (21절) 하는 가정 파괴로 이어집니다. 가정은 사회조직체 가운데 가장 기초단위로 혈연과 사랑으로 맺어지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최후의 보루가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가족이 서로를 거슬러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사회구조의 기초단위가 파괴되는 비극의 극치에 이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족과 이민족 그리고 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 (22ㄱ절) 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이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이름 때문에” (22ㄱ절) 라고 지칭하시며, 박해를 당하는 이들을 위한 위로의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하고 위로하십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일러주실 것” 입니다. (19절) 왜냐하면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 (20절) 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는 제자들의 직무이지만 제자들은 하느님의 일꾼이자 도구일 뿐 그 일의 참된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세상은 ‘아버지의 영’  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제자들 안에 함께 계시는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실 것입니다. (요한 14, 16 – 17) 따라서 제자들은 복음 선포의 결과와 자신들의 신변에 대해서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기” (마태 10, 30) 때문입니다.
 
또한 박해가 비극의 극치에 이른다 해도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22ㄴ절) 이라고 위로하십니다. 그러면 ‘끝까지’  는 어디까지를 이르는 것일까요 ? 제1독서의 ‘즈카르야’  를 헤아려 볼 때, ‘끝까지’  는 단순히 박해가 끝나는 시점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끈질긴 인내와 항구한 믿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의 정점입니다. 또한 부모님은 순교의 자리로, 형제들은 거리로 내몰고도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며 자신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김대건 신부님의 삶을 되새겨 볼 때, ‘끝까지’  는 종말론적인 구원과 순교 이후의 영생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의 ‘구원’  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지만, 그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 마음 안에도 있어 순교의 빛으로 영원히 기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Meditatio)
복음을 증언하는 삶은 세상 속에 융화되는 것이 아니라 분리라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복음은 세상의 가치를 넘어 ‘예’  를 요구하는 세상에 ‘아니요’  라고 말하고, ‘아니요’ 를 요구할 때 ‘예’  라고 할 수 있는 용기와 굳셈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마태 5, 37; 6, 1. 24; 2역대 24, 18 – 22 참조) 그래서 복음은 세상을 역행하는 미움과 소외라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지만,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2ㄴ절) 라고 하신 말씀에서 힘을 얻습니다. 참으로 제가 선호하는 것이 합리화를 찾아 흘러가는 안락과 편리인가 아니면 진리를 찾는 불편한 역행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기도 (Oratio)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생각하시어 저를 이끌고 인도하소서. (시편 31, 4)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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