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7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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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07-03 | 조회수30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11년 7월 3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 제자들이 앞으로 당하게 될 일들을 보고 계신 듯 합니다. 그리고 2천년 후에 사람들인 우리가 보기에 이 일들은 예수님이 먼저 겪으실 일들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을 믿고 산다는 것, 그것은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 안에서조차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며 사는 이에게 묻습니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랑한 이유를 사람을 회의에 넘기고 채찍질하며 끊임없이 그게 진심인지, 무엇 때문인지 묻게 됩니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우리의 현실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우리는 그 이유로 판단되거나 매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일수록 성공해야 한다는, 그리고 그 성공한 예를 따라 자신도 기회를 얻어보려는 노력으로 하루를 채우곤 합니다. 하느님을 믿어서 우리가 당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이상하게도 보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습니다. 어딜 끌려가서 증언하는 일조차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가 입을 여는 것이 용기있는 일로 여겨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적어도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박해시대에야 해당되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지금 우리에겐 그런 상황이 없으니 말입니다. 오히려 신교와 구교가 서로 헐뜯고 싸우는 것이 신문에 가끔 보도될 뿐, 우리는 미워하고, 비웃고, 이기고, 무시하는 법으로 일관할 뿐 서로 궁금해하려는 시도 조차 없습니다. 물론 그런 모습은 오늘 복음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신앙생활에 어떻게, 무엇을 말해야 할 상황이 온 예가 있습니까? 신자들끼리 나눔이나 피정에 간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누군가를 성당에 데려오기 위해 우리 스스로의 용기로 청하는 것 외에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를 얻기가 힘듭니다. 혹 성당에 다녀서 좋은 점, 얻은 점을 자랑한 예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도대체가 하느님을 왜 믿는가를 물어보지도 않는, 게다가 호기심에 가까운 질문들은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내용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주님은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다 당하게 되는 상황들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우리가 그만큼 좋은 시절을 타고 나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숱한 순교자들의 피로 얻은 신앙의 자유라고 누리면 될까요? 불편하지 않은 삶에 이런 질문은 필요없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신앙생활은 꼭 불편함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사실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조차 없는 것은 우리의 삶이 천국과 같지 않다면 분명 이상한 자유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서 일어날 이 혼란스러움을 우리는 겪지 않고 있습니다. 고작해야 성당에 가라 말아라가 싸움의 전부이며 이 역시 가정이나 성당이냐 등의 중요성을 두고 싸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한 싸움에서조차 우리는 밀리면 안되고 결국 이기는 법을 찾는 것이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용맹한 우리의 자세에 걸맞지 않은 당부를 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견디는 것과 이기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견디는 것은 분명 일방적으로 당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러하셨듯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힘 없이 끌려가는 순한 양과 같은 삶이어야 합니다. 주고, 당하여도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내 놓아버리는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움켜쥐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의인이라 기세등등한 이들의 자만심을 사랑의 하느님으로 근거를 없애 버리는 일에서 당하게 될 모함과 박해가 예수님 말씀의 내용입니다. 세상은 분명 이기적인 상황으로 돌아갑니다. 이기적이라는 말이 남에게 해가 되는 것까지 포함한다 하여 개인주의적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써가며 다른 이가 해를 보는 것에서 눈을 돌리고 나부터 사랑하고 나부터 행복한 것을 좋아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분명하다면 세상 이치에 맞을리도 맞을수도 없습니다. 박해는 당하지 않아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조차 묻지 않는 세상을 보면 분명 우리가 하느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살지 않는것 같다는 조심스런 걱정을 해봅니다. 우리가 세상에 드러내고 살려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의 질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사는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이 전교하는 것이 전부라면 기초도 없는 집에 지붕만 화려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지붕도 다른 지붕보다 더 화려하게 하기 위해 결국 무너질 집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됩니다. 복음이 이리 힘 없이 느껴지는 날이 있었는지 생각해봅니다. 2천년 전, 우리의 순교자들 그들의 삶이 분명했음에도 우리에겐 이 고민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에 사치스런 편안함 속에 고민이 밀려드는 하루일 것 같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한국 성직자의 수호자이십니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님이 우리나라의 성직자들이 가진 것 중 무엇을 지켜주셔야 할 지 궁금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그 짧은 일생이 성직자들이 지니고 싶어할 가치일지도 궁금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 우리는 김대건 신부님께 '왜 그렇게 사셨냐'고 물어야 할 위치에 서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렇게 바보같이 왜 하셨냐고 말입니다. 좀 더 살아서 좋은 일도 하고 성공도 하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가 왔고 성직자들의 성직이 존중되고 지켜졌다고 말하기에 그분과 우리는 너무나 다른 것 같습니다. 조심스레 오늘 복음에서 느껴지는 향기를 꺼내봅니다. 혹시 우리의 이 편안함이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위치에 있어서가 아닌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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