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멍에와 짐" - 7.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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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1-07-03 | 조회수417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2011.7.3 연중 제14주일 즈카9,9-10 로마8,9.11-13 마태11,25-30
"멍에와 짐"
오늘은 연중 제14주일 ‘멍에와 짐’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과연 여러분은 멍에와 짐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구체적으로 여러분의 멍에와 짐은 무엇입니까? 세상에 멍에와 짐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
리의 멍에와 짐은 그대로 우리의 운명입니다. 멍에와 짐을 내려놓고는 사람이 되는 길도, 구원을 받는 길도 없습니다. 불가의 인생고해라는 말은 바로 멍에와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간현실에 대한 정의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살아갈수록 가중되는 멍에와 짐입니다. 살아간다는 자체가, 때로는 몸조차도 불편한 멍에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여 제가 자주 화두처럼 형제들에게 던지는 물음이 있습니다. “삶은 선물입니까 혹은 짐입니까?”
대부분 쉽사리 대답하지 못합니다. 병고로 신음하는 분들을 대하면 정말 살아있다는 자체가 고통의 멍에와 짐임을 실감합니다. 거칠게 말하면 죽어야 멍에와 짐으로부터 해방입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삶의 멍에와 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주님께 돌아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며 사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멍에와 짐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종류와 양상은 다 달라도 예외 없이 멍에와 짐을 지고 사는 우리들을 초대하시는 자비하신 주님이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주님의 고마운 초대에 응답하여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진정 쉴 수 있는 쉼터는 주님뿐이 없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며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예수 성심을 배우는 것입니다.
평생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배움터이자 쉼터가 바로 예수 성심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짐은 가볍다.”
예수성심 안에 머물며 온유와 겸손을 배워갈 때 우리의 불편한 멍에는 주님의 편한 멍에로, 우리의 무거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바뀌어 참 안식을 누립니다.
때로 무겁게 보이는 수도원의 일과표라는 멍에와 짐도, 우리의 삶에서 오는 갖가지 멍에와 짐도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나갈 때 점차 주님의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으로 바뀌어져 내적 자유와 평화를 누립니다.
둘째, 하느님의 철부지 되어 마음 깨끗한 이로, 마음 가난한 이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을 때 주님께서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의 선물이 우리를 거룩한 바보, 철부지로 살게 합니다.
즈카르야 예언자의 다음 말씀은 미사 중 우리를 찾아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딸 시온이나 딸 예루살렘에 지칭하는바 바로 주님을 찾는 우리 모두를 의미합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이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타고,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오늘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겸손히 우리를 찾아오시어 평화와 기쁨을 선사하십니다. 이런 주님을 체험하면서 비로소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삶입니다. 철부지의 사람들 ‘大愚의 사람들’ 같으나 역설적으로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달아 안 거룩한 바보들 ‘大智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철부지의 삶이요 이런 우리를 향한 주님의 감사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미사 중 주님께서 철부지 우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를 마음 깨끗한, 마음 가난한 철부지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철부지로 살아갈 때 우리의 멍에와 짐은 주님의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으로 바뀝니다.
셋째, 성령의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멍에와 짐에 모른 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보다 우리의 처지를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사는 게 아니라 은총의 성령이 우리를 지고 삽니다. 내 힘으로 살려 하기에 불편한 멍에요 무거운 짐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 때 비로소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이 됩니다. 짐 같은 삶은 선물 같은 삶이 됩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사시기만 하면, 우리는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멍에와 짐 역시 상대적입니다. 내 중심의 이기적 육적 삶을 살기에 불편한 멍에요 무거운 짐이지만, 성령 따라 하느님 중심의 영적 삶을 살 때 점점 나(ego)로부터 벗어나 편해지는 멍에와 가벼워지는 짐입니다.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육에 따라 살면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성령 따라 살지 않고 육에 따라 살기에 인생고해요 갈수록 불편해 지는 멍에에 무거워지는 짐입니다. 성령에 귀 기울이십시오. 성령 따라,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십시오.
이 성령의 힘이, 은총이 우리의 멍에와 짐을 주님의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으로 바꿔줍니다.
아무도 자기 고유의 멍에와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각자의 멍에와 짐은 그의 고유의 운명입니다. 멍에와 짐을 내려놓을 수도 없거니와 내려놓았을 때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멍에와 짐이 역설적으로 사람이 되게 하고 구원의 길로 이끕니다.
하늘나라 입장 때 하느님은 우선 각자의 멍에와 짐을 충실히 져왔는지 점검하실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초대한 이들도 삶의 현장에서 멍에와 짐을 지고 수고한 이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멍에를 벗어버리고 짐을 내려놓은 무책임한 사람은 주님의 초대에서 제외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니 이 거룩한 미사 중 우리 모두 자기 운명의 멍에와 짐을 잘 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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