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7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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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07-04 | 조회수326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2011년 7월 4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26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청을 들어주실까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조건 청하기만 하면 안된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고 눈물을 흘리는 참 통회의 기도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기적들을 살펴 거기에 대한 대답 하나를 찾고자 합니다. 복음 속에 기적의 대상은 죽어버린 소녀와 열 두 해 동안 피를 흘려 부정한 채로 삶을 이어가는 한 부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여다 보면 정작 우리 눈에 드러나는 사연의 주인공은 소녀의 아버지 뿐입니다. 기적이 필요한 이는 소녀요 부인이지만, 소녀는 죽어버렸고, 부인은 드러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딸을 살리기 위해 회당장인 아버지는 주님을 찾아 그 앞에 엎드립니다. 마을의 원로요 하느님의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던 이가 종의 모습을 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그의 이 말이 주님을 자리에서 일어서시게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딸마저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반면에 이 부인은 우리에게는 공개되었지만 복음 안에서는 철저히 숨겨져 있는 모습입니다. 부인의 병은 혈루병 피를 흘리는 부정한 병입니다. 하느님의 주신 생명을 나타내는 피는 몸 밖으로 흘렀을 때 곧 그 사람이 부정하게 됩니다. 열 두해라는 시간은 그녀의 이 병이 극복할 수 없는 병이라는 의미이며, 그녀의 운명은 저주 받은 것처럼 늘 부정한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병을 드러낼 수도 없을 뿐더러 사람들도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는 병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의 뒤를 따라 걷습니다. 그리고 입을 열어 자신의 마지막 남은 희망을 드러내지도 못합니다. 그녀의 바람은 그녀의 마음에서 울립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마음에만 있는 바람, 그래서 이 부인의 청은 세상에 공개되지 못했습니다. 우리 귀에 들리는 이야기는 그녀에게 던지시는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에게 들리는 주님의 목소리는 도대체 이 여인이 무슨 믿음을 가졌는지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그 믿음이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결국 그녀의 흐르던 피도 멈추게 한 것은 분명합니다. 두 이야기 속에 우리는 하느님께 청하는 전혀 다른 모습의 두가지 청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두 방법 중에 어느 것이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는 없습니다. 아버지처럼 엎드려 청하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방법이라고 말하기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여인의 모습은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또한 소녀의 아버지와 부인이 주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했다고만 설명하기에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담겨진 진심은 딸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마음이 먼저입니다. 부인이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도 그분의 능력을 생각하기 전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희박한 마지막 희망이었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오히려 이 두가지 청이 이루어진 이유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신 예수님의 마음이셨습니다. 딸을 살리기 위해 그분을 찾고 그분 앞에 엎드려 자신의 지위와 명예와 모든 것을 던져낸 아버지의 딸에 대한 마음과 세상에 버림 받고 모진 목숨 연명하는 것이 세상 살이의 전부인 한 여인이 예수님께 거는 막연한 희망 하나를 헤아리신 것은 주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통점이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랑" 이 그 공통점입니다. 예수님은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아버지가 바란 바람대로 소녀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일상에서 일어나는 삶으로 돌려 놓으십니다. 소녀의 죽음을 확인한 사람들과 아버지, 그리고 복음을 통해 이 이야기를 지켜보는 우리에게 소녀는 분명 죽음에서 일으켜졌지만 주님은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때 소녀의 죽음을 죽음에서 단잠으로 바꾸어 버리십니다.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이 일은 주님의 능력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기적을 숨긴다는 거창한 의미가 아니라 이 일은 그의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주님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손을 대어 소녀를 일으키시고 아버지에게 돌려주신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녀는 아버지께 다시 맡겨집니다. 목숨처럼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주님은 능력이 아닌 사랑으로 이 일을 마무리하신 것입니다. 부인의 말못할 사연을 아신 주님이 그녀의 여린 희망을 기적으로 돌려세우실 때도 주님은 그 기적의 이유를 그 부인에게 돌리십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복음은 예수님의 이 말씀과 더불어 부인을 복음에서 사라지게 합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 이 여인의 기적은 감추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감추신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의 하느님께 대한 한자락 희망을 하느님께서 너의 마음 그대로 너를 사랑하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병의 나음은 그 다음입니다. 하느님께 어떻게 청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헤아리시는 우리의 마음은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청하는 모습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려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 대해 모르시는 것이 없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그분이 우리의 어떤 기도를 좋아하실까 고민을 시작하려 할 때 하느님은 우리를 처음부터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며 서로를 이 아버지처럼 사랑해야 하며, 하느님께는 어떠한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은 당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우리가 지닌 사랑으로 그 응답을 해 주실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본 기적들은 주님으로부터 숨겨진 일상의 사건들일 뿐입니다. 복음을 읽었다고 해서 그 진실을 알았다고 주님을 찬미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잘못 헤아리는 것일지 모릅니다. 소녀는 잠에서 깨어나는 소동을 겪었을 뿐이고, 부인은 주님 뒤를 따르다 주님의 말씀 하나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서 남은 생을 살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며,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놓지 않는 부인의 삶의 의지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든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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