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몇 년 전부터,
특히 소팔가자를 방문한 작년부터
성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저에게 도전이요 화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단한 열성으로 쫓지는 못할지라도
간간이 김 대건 신부님의 삶과 영성을 뒤적여보았습니다.
올해는 두 측면에서
김 대건 신부님의 삶과 영성을 조명해봤습니다.
첫째는 패가망신입니다.
둘째는 순례자와 나그네의 삶입니다.
김 대건 신부님의 삶은
한 마디로 패가망신(敗家亡身)의 삶입니다.
신앙 때문에, 천주교 때문에
잘 나가던 집안이 완전히 망했습니다.
1830년 할아버지 김 택현이 먼저 신앙 때문에 돌아가셨고,
1839년 아버지 김 제준이 신앙 때문에 돌아가셨는데,
그것이 사위, 즉 김 대건 신부님 자형의 밀고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1836년 김 대건 신부님을 유학 보내고 이런 변을 당한 어머니는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살다가
1845년 잠깐 아들을 만났는데
그 아들 김 대건 신부님마저 돌아가십니다.
어제 김 대건 신부님 대축일
제 1 저녁기도 성무일도를 바치는데
시편 118편의 다음 구절이 마음에 꽂혔습니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보리라,
주님의 장하신 일을 이야기 하고자.”
이 말은 이런 뜻도 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 애착 때문에 구차하게
그리고 꾸역꾸역 오래 사는 게 아니라
산다면 주님의 장하신 일을 이야기하고자
더 살려는 것이고,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일찍 죽어도 좋고,
또 주님의 장하신 일을 이야기하기 위해 살기도 하지만
주님의 장하신 일을 이야기하기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입니다.
“나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지난 주 선교사 형제들과
피정과 연수를 하였는데 피정도 좋았지만
선교사 형제들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던 연수가 더 좋았습니다.
그때 한 형제가 아주 대담한 얘기를 하였습니다.
우리의 선교가 하느님 뜻에 맞지 않고,
우리가 하느님 뜻대로 잘 살지 못해서 망하는 것이라면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살리려 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선교는 망해야 하며,
망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자기를 비워야 한다는 얘기고
그만큼 하느님 뜻대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얘기지요.
실상 우리는, 아니 나는 망해야 합니다.
하느님 뜻대로 못 사는 나는 망해야 하고,
하느님 뜻대로 살기 위해 내가 망해야 합니다.
내가 망하지 않고는
하느님 뜻대로 절대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패가망신한 김 대건 신부님의 삶이
저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두 번째는 순례자와 나그네의 삶입니다.
이것은 프란치스칸의 삶이지만
프란치스칸만의 삶은 아니지요.
주님을 따르다보니, 주님의 뜻을 따르다보니
자연히 순례자와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김 대건 신부님은 25세 짧은 생을
정말 순례자와 나그네로 사셨습니다.
우선 돌아다닌 거리가 엄청납니다.
마카오, 필리핀, 상해, 만주를 걸어서 다녔고,
한국에 들어와서는 다시
낙엽 같은 배로 중국으로 가셨으며,
또 다시 배로 가시려다 붙잡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순례자와 나그네의 삶을 실제
발로 몸으로 사시기도 하셨지만
마음과 정신으로 그 삶을 사신 것이 더 찡합니다.
15살 그 어린 나이에 어찌 떠납니까?
75세에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도 대단하지만
15살에 떠난 김 대건 신부님도 정말 대단합니다.
제가 만나는 새터민 아이들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기가 막힙니다.
그 어린 나이에 중국과 몽고를 떠돌다 한국에 온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제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그야말로 어려움 정도가 아니라
사선을 넘나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 대건 신부님은
그들처럼 내몰려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하느님을 위한 선택이고 결단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무슨 마음으로 이런 선택을 하고
어떤 정신으로 이런 결단을 내렸는지 감탄을 하게 됩니다.
그 어린 나이에 선택한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고,
그 소중한 것들을 버린 만큼
선택한 것에 All-in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축일을 지내는 오늘,
버리지 못하기에 선택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다 소중하기에 제일 소중한 것이 없는 우리에게,
이런 김 대건 신부님은
엄청난 도전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도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엄청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간단하게 무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봅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