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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순교적 삶" - 7.5,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05 조회수372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1.7.5 화요일

한국 순교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1821-1846) 대축일

역대기 하24,18-22 로마5,1-5 마태10,17-22

 

 

 

 

"순교적 삶"

 

 

 

초지일관 순교적인 삶이어야 합니다.

어제 사촌 형님과의 대화를 잊지 못합니다.

“사람은 나이 들어가면서 다 비슷해지는 것 같습니다.”

라고 제가 말하자 사촌 형님의 말씀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럼 다 똑같아지지.

  60대가면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똑같고

  70대가 되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똑같고,

  80대가 되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똑같아져.”

 

참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런 점차 똑같아지는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 중심의 순교적 삶을 사는 이들은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익어가는 신망애 삼덕의 열매를 뜻하며

바로 이게 순교적 삶입니다.

얼마나 살았는가가 아닌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교하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대하면

늘 신선한 충격이요 감격이요 도전이 됩니다.

죽어서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사는 삶이 순교적 삶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는 삶이 순교적 삶입니다.

하느님과 우상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섬길수록 우상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우상숭배가 횡행하는 시대입니다.

 

하느님을 빼놓으면 모두가 우상이 됩니다.

하느님을 중심에 모셨을 때는 돈, 재물, 명예, 건강 등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이 되지만

하느님을 잊어버리면 이 선물들은 모두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하여 하느님을 잊어 삶의 목표를 잊어버릴 때

십중팔구 우상들의 유혹에 빠집니다.

 

“너희가 주님을 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버렸다.”

 

하느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얼빠진 삶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삶이 아닌 죽은 삶입니다.

 

“그 무렵 요아스 임금과 유다의 대신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독서 말씀처럼,

하느님이 내리는 진노의 심판이기 보다는

우상을 섬김으로 스스로 자초한 진노의 심판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에 항구할 때

늘 영원한 청춘의 순교적 삶입니다.

 

 

신망애 삼덕의 삶에 항구함이 순교적 삶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신망애의 열매입니다.

이파리만 무성하고 신망애의 열매 부실한 삶이라면

참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인생일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가 신망애의 삶이 바로 순교적 삶의 원천임을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신망애 삼덕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바로 신망에 삼덕이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보다 더 귀한 보물은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에서 샘솟는 희망과 믿음이 순교적 삶에 항구하게 합니다.

 

외적으로는 다 똑같아 보이는 삶이지만

이런 익어가는 신망애 삼덕의 열매 있어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삶이 순교적 삶입니다.

끝까지 내 운명을 견디며 살 때 구원입니다.

누구나 주어진 그 고유의 멍에와 짐의 운명입니다.

하느님은 등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완주(完走)하는 것을 보십니다.

 

삶은 100m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입니다.

끝까지 내 멍에와 짐의 운명을 지고

끝까지 뛰어 갈 때 누구나 구원입니다.

그러니 운명의 멍에와 짐을 가볍게 해 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이 운명의 멍에와 짐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감당할 수 있는 신망애 삼덕의 은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온갖 유혹 중에서도 끝까지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감이

바로 순교적 삶이요 구원입니다.

하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 말씀 중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대목이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

 

 

순교적 삶에 항구할 때 아름답고 향기로운 영원한 청춘의 삶입니다.

우상이 아닌 하느님을 섬기는 삶에 항구해야 합니다.

신망애 삼덕의 열매를 가꾸는 삶에 항구해야 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삶에 항구해야 합니다.

 

바로 이게 순교적 삶이요 지금 여기서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삶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이런 항구함의 은총이요,

순교적 삶에 항구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늘나라의 선물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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