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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706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06 조회수302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1년 7월 6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이렇게 선포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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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세우시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지금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며 '거룩하다'는 말들을 곧잘 사용해서 표현합니다. 하느님이 그들 안에서 활동하신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런 이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받은 열 두 제자는 예수님의 사명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그들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받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을 받았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줄 능력까지 받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복음은 이 대단한 능력을 받은 열 두 제자를 소개합니다. 베드로부터 유다 이스카리옷까지 열 두 사람은 예수님께 사명과 능력을 받아 그 스승이 하는 일을 그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이름들은 대단하기만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들은 예수님의 선택을 받았을까? 


아마도 그들이 예수님의 사명을 실행한다면 아마 그 놀라운 능력들 때문에 그들의 이름은 더욱 빛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그들의 어떤 배경도 하느님 선택의 이유로 설명되는 일들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보내시며 일종의 한계를 세우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이 말이 이스라엘이 우선 구원되어야 한다는 뜻인지, 그렇게 예수님이 구원에 차별을 두신 것인지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가졌으니, 어디든 못가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이것에 머물고 있을 때, 이 말씀에 금지가 되어 있는 지역과 제자들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이 당시의 현실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른 민족과 사마리아인의 고을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범위 안에 포함하지 않는 지역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그분의 은총과도 거리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들에게 하느님은 어쩌면 생소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유로 만약 그런 곳에서 제자들이 활동을 했다면 그 대상이 되는 이들은 걸러질 것이나 고민 없이 하느님을 선택과 신앙의 대상으로만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는 일이니 보람도 있고 자랑스러울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집안에 가라는 말씀은 상황을 조금 복잡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그들이 받은 것은 주님의 사명이었지만 그들이 향해야 하는 곳이 이스라엘 안이라면 그들은 그들의 사명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들 안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 안에서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행동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이미 예수님의 활동에서 그분의 활동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본 기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못하게 하는 마귀를 쫓아내시고서 바리사이에게 마귀 우두머리의 능력을 빌려 기적을 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으십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몰라보고 의심하는 상황이 제자들 앞에 놓여진 것입니다. 그것도 스승이 아닌 그 제자들이니 그 어려움은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이런 어려운 일을 제자들에게 시켰을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이 뽑으시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 듯 싶습니다.


이런 상황을 예수님이 만드신 이유는 모든 고을로 움직이시며 이스라엘을 보신 주님의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의 파견이 이스라엘 집안에 한정된 이유는 하느님이 구원하신 백성들이 수확할 때가 되어도 주인을 뜻을 모르는 상태로 아무런 수확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벼로 자랐으나 자신이 벼인줄도 모르는, 가라지로만 취급되고 뽑혀 불태워질 운명만을 겁내고 주인을 사랑한다고 겁먹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의인들 앞에서는 여전히 가라지가 되고 마는 이들을 구원하실 일꾼으로 제자들은 불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모든 것에 앞서 이스라엘이 먼저 구원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유일하게 하느님을 아는 백성 안에서조차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 때문에 그들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들과 모든 것이 같았던 사람들이 일꾼으로 뽑힌 것입니다. 

또한 이 사명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현실 속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 세리, 혁명당원 등의 평범한 생활인들이 바로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 하느님이 달리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그들의 말로 이야기하고 그 증거를 버림받은 이들과 힘겨워하는 이들을 살려냄으로써 보여주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행동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일의 동기나 의미도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동기는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제자들의 사명이 이야기하는 것 또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던 셈입니다. 


숱한 예언자를 뽑아 세워 당신의 말씀을 주셨던 하느님은 이제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세상의 사람들과 같은 이들에게 그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선택이라는 가장 중요한 일을 맡은 이들이, 하느님에 대해 잘 길러지고 대단한 능력을 갖춘 이들이 아니라 보통이라 부르는 흔하디 흔한 모두가 포함되는 이들 중의 평범한 이들이 사도가 된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수확할 일꾼을 그렇게 뽑으셨습니다. 


결국 그들이 외치고 보여주어야 할 일은 이것이었습니다. 



"가서 이렇게 선포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바로 그들이 하늘나라를 선포하였기에 사람들은 동요하고 실제 삶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특별함으로 치장된 삶을 사는 이가 하늘나라를 선포하였다면 우리는 또 다시 겁을 먹고 이내 포기하며 어쩔 수 없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 선택되었다는 표현을 하면서 이미 선택과 능력과 구원을 지닌 사람 앞에 보통 사람들이 구원을 꿈꿀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특별한 사람을 말하면서 하늘나라의 구원이 모두에게 같은 하늘나라가 주어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의 불림을 받은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곁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처럼 생각하고 사는 이들 중 하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이시기에 그 일을 맡은 이들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뽑힌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이 원하시는 일을 맡은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들을 다른 이들로 보지 마십시오. 그러면 나를 이미 구원에서 제외시키는 일일 뿐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주님이 주신 것이어서 그들은 도구일 뿐입니다. 그 능력이 하느님과 친분과 은총의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지도 또 그렇게 상황을 만들어서도 안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이들은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는 것을 전하는 것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출신이나 재능을 떠나 먼저 온 고을로 스스로 걸어들어가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가르치며, 그 하느님이 우리 삶에 실재 계심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나라인 사랑이 모든 이들에게 전해짐을 가장 약한 이들을 도우며 드러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갈 수록 더 좋은 사람을 찾아 헤매지만 더 좋은 사람이란 처음부터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아는 자 그는 능력의 의미를 잘 알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깨달음과 선택에 달려 있는 모양입니다. 하는 일은 같으나 주님처럼 눈 앞의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일이 그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을 특별히 보지 마십시오. 그러면 하늘나라를 볼수도 없고, 하늘나라의 사람이 바로 우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은 일꾼이며 우리를 사랑하게 만들어 하느님께 함께 갈 사랑하는 형제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반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과 사랑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바로 지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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