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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교회는 부자의 외관을 가지지 않는다/ 최강 스테파노신부
작성자오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06 조회수651 추천수6 반대(0) 신고

 

눈부신 경제발전과 더불어 빈부의 격차가 너무나 심각해져가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여러모로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약자의 편에 서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자로서 교회는 그들에게 최대의 봉사를 아끼지 말아야 할 위치에 있다. 그것은 교회의 창시 때부터 지니고 있는 본래적 사명이다.


그러나 요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의 가난 문제를 지적한다. 교회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무엇을 실천하고 있는가를 묻기 이전에 교회 스스로의 가난의 실천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현실이다. 사실 교회는 전반적으로 너무 부유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크고 화려하게 보이는 성당 및 사제관들, 교회가 갖고 있는 넓고 값비싼 땅, 거기에다 사치스럽게 산다고 보여 지는 성직자와 수도자들...... 배부른 교회가 어찌 가난한 자들의 마음을 알겠는가? 나는 무엇보다도 오늘날 교회가 가난을 증거 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가난한 이웃, 불우한 이웃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사랑이 충분히 수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브 꽁가르 신부는 그의 저서 『봉사하는 교회, 가난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에서 가난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먼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가 아니고서는 결국 교회의 존재 이유(raison d'etre)찾기 힘들다고 역설하고 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주위의 이웃 중에 굶주리고, 헐벗고, 목마른 사람들을 주님으로 모시려는 삶의 양식과 영성적 깨어있음이 그들 생활의 근본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라고 불리는 피에르 신부는 그의 저서 『단순한 기쁨』에서 오늘날 “인류와 교회가 겪고 있는 불행의 일부는, 부유한 신자들이 성직자들에게 자신들과 비슷한 생활조건을 보장해줌으로써 복음서의 어떤 글들이 절대로 자신들에게 설교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술수에서 비롯”된다고 적고 있다. 칼 라너는 “짐작컨대 교회는 자기의 의무인 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가난’을 통하여 ‘가난을 제거하는 투쟁에 있어서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스스로 가난해지려는 일에 있어서 무능하기 때문이다”라고 풍요로운 교회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되어야 하며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 육신의 빵과 영혼을 빵을 마련해주고 배려하는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여야 한다. 교회와 성직자들은 부자들의 환대에 눈멀고 귀 멀어 복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경계하고 오히려 풍요로운 자들의 잉여 재산을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에서부터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향해 베풀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가 부유층에 둘러 싸여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차별대우까지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복음전파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가 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하게 태어나시고 가난하게 살아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가난한 삶을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가 9, 58) 주님은 안정과 정착의 삶을 포기하시고 가난한 나그네로 살아가신 것이다. 또한 주님은 자신 만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19,21)라고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모든 신자들은 명심하여야 한다. 물론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분부를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실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가난한 사람’에 대한 나눔의 실천은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데 필수조건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 한다’는 옛말처럼 교회도 가난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며 현실적으로 가난을 구제하는 사명을 수행하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세상 사회의 의식과 구조가 어느 정도 개발되고 개선되어야만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네 소명을 깨닫고 이를 효과적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이 현대에 있어서도 교회가 그 개인적인 성원들이나 단체를 통해 아무리 가난을 제거하러 나선다 하더라도 당장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해봤자 별 수 없으니 아예 안했다는 이유를 가지고 하느님의 교회라고 떳떳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소홀히 취급한다면 교회는 현대의 가장 진실하고, 가장 의미 깊은 요구에 응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품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는 것이다. 교회가 복음의 진리에 보다 밀접하게 적응시키고 현대의 여러 가지 문제에 보다 잘 응하기 위해서라면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을 가난한 이들을 향한 봉사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가난한 자로 보이기 어렵고, 가난한 이웃을 주님처럼 섬기지 못하는 내가 교회의 사명으로서의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를 이야기 하는 게 위선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한국외방선교회의 선교사로서 보편교회의 근본 사명이라고 할 수 있는 외방선교 사명을 수행해 나가면서 전적으로 그곳의 가난한 이들의 생활수준에 맞춰 살아갈 것을 조용히 다짐해 본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향하여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은 결코 부자의 외관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나선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양식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특히 말 구유에서 태어나신 그리스도의 ‘가난하셨던 삶’에 유의할 것이다. 적어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선교사로써 적어도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효과적이고 실제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 체험될 수 있도록 그들과 함께 가진 바를 나누며 ‘가난한 삶’에 항상 깨어있으리라......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http://cafe.daum.net/frchoi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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