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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4주간 - 감사....감사....[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07 조회수547 추천수5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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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티 성지 - photo by Y. Benedict

 

 

 

 

 

†찬미예수님

 

 

아까 고해성사 보면서 지는 해를 보니까 꼭 빨간 성체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7월 달은 아마 사람들이 더워서 안 올 거다!’

지난달에 한 2000명이 넘게 왔는데, 보니까 지난달이나 거의 똑같아요.

이 더운 날씨에 오느라고 애썼습니다.

 

토요일은 제가 밖에 안 나오는 것이 평화를 위해서 좋은 것 같아서 안 나오는데

이 더운 날씨에 땀흘려가면서 아침부터 여기에 오게 한 그 힘이 뭘까?

‘아~ 이 양반들은 제 발로 오는 것이 아니다.’

 

성모님께서 지남철이 쇠를 끌어당기듯이 여러분을 이곳으로 이끄시는거예요.

여러분 중에는 어제 저녁까지도 몸이 찌부둥하고 아파가지고

‘이번 달은 숼 거야~ ’

했다가도 또 아침이 되니까 도지죠? 그 병이 감곡병이 도지잖아요.

시원한 물가에 가서 발 담그면 훨씬 더 좋을 텐데, 이 더위에 여기 와서 끔찍이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닌데 오신단 말이에요.

 

그런데 다니시는 분들의 얼굴을 제가 유심히 망원경으로 얼굴표정을 보는 봐요.

그런데 여기 들어올 때 얼굴이랑 떠날 때 얼굴이 달라져요.

이것은 치유가 되는 거고, 구마가 되는 거고, 믿음이 굳어지는 거죠.

 

오늘 7월 기도찬미의 밤 강론은 제가 주제를 ‘감사’로 정했어요.

감사

오늘 이렇게 온 것 감사할거죠?

이렇게 곤충님들이 안 나타나고 이렇게 조용한 것도 얼마나 감사 한거고, 바람이 그냥 ‘쫙~ ’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적당히 미사수건 날아가지 않을 정도로만 요렇게 불어주는 것도 또 얼마나 감사할거예요?

너무 감사할게 많아요.

 

우리 신자들이 하느님 앞에 십자가 앞에 섰을 때 과연 하루 종일 살면서 몇 번이나 감사하는가?

감사와 찬미가 있는 곳에는 하느님의 축복이 끊임없이 내려가지만

불평불만이 있는 곳에서는 마귀의 장난밖에 없어요.

그래서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불평불만을 하게 만들어요. 그렇지요?

 

성지에 오려고 구일기도도 바치고 준비를 많이 하고,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부르심을 받고 와요.

이곳에 와서 왔다갔다하다보면 또 불편한 일이 있어요.

왜냐?

여러분이 떠날 때부터 마귀도 같이 떠났어요.

마귀는 성지순례 하러 온 게 아니죠?

마귀가 이쪽을 향해서 여러분과 같이 떠난 그 이유는 뭐예요?

지금 요기 가는 요놈, 요 인간 은총 못 받게 하려고 해요.

어떻게 해서든지 화나게 하고 분노하게 하려고.....

아침에 보니까 앞에 앉으려고 싸워.

요 앞자리 요기가 아주 A석 10만원짜리인가 봐.

아무튼 마귀라고 하는 놈은 어떻게 해서라도 불편함을 느끼게 만들어서

여기 찾아온 목적을 잃어버리게 만들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세 시간 네 시간 교통체증을 뚫고 네 시간 다섯 시간여기를 와서 30분 동안 싸우고 가.

그런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은총 받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에요.

 

하다못해 아까 고백성사를 볼 때 아까도 내가 보니까 열댓 사람 남았어.

보좌신부님 줄에도 열 댓명 남았어.

그 사람들 자기 앞에서 끊어졌으니 얼마나 성질이 나겠어요.

'하필이면 나 앞이야?'

화난다고 그때 나도 모르게 분노가 일어나는 거예요.

 

수녀님이 와서 '순명하세요.'

신부님이 미사를 하러가야 되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서운한 거예요.

그런 것들이 어둠으로 오늘 받을 은총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은총과 어둠은 햇볕이 강하면 뒤에 그림자가 진하듯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서 다녀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속으로 구마기도하세요.

‘나사렛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그리스도에게 가라.’

스스로에게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나고 어둠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하고 계신 분 이 거룩한 홀리랜드(holy land), 거룩한 땅에 와있으면서도 아직도 마음이 성난 파도처럼 흔들리는 분들은 스스로에게 구마기도하세요...분명히 잔잔해질 거예요.

 

우리들이 하느님 앞에서 묵상할 때 감사해야 할 가장 원초적인 감사거리가 뭘까요?

우리가 발에 밟히는 지렁이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사람이 무서워 피하는 바퀴벌레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

그것부터 감사하지 않으면 다른 것은 감사할 수가 없어요.

감사의 모든 첫 단추는 내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모습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이 우리를 흙으로 빚으셨어요.

흙으로 사람의 형태를 만들어놓으셨고 눈코 입을 다 만들어서

사람처럼 형태를 만들어놨어도 아직까지도 그때는 진흙인형이에요.

땅바닥에 이렇게 진흙 인형을 만들어 놓고 코에 숨을 불어넣을 때 하느님이 어떻게 하셨을까?

무릎을 꿇으신 거예요.

그 진흙인형 앞에 무릎을 꿇고 ‘후~’

 

창조주가 다른 세상의 모든 것은 말씀 한마디로 이루어졌어요.

‘새가 되라! 별이 되라! 해가되라.’

말씀 한마디로 이루어졌지만 당신의 모상을 닮은 사람을 지을 때에는

창조주가 피조물 앞에 무릎을 꿇고 뺨을 갖다 대면서‘ 후~ 후~’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무릎을 꿇으면서 까지 만드신 거룩한 존재가 우리들이라는 거예요.

 

너무너무 인생이 괴롭고 꼬이고 하는 일 마다 안 될 때는 날아가는 새를 보면 부럽죠?

‘아~ 새라면 나 같은 고민은 없을 텐데.’

새가 고민이 없겠어요?

내가 물어봤더니 우리들 하는 고민은 고민도 아니여.

새가 그게 노래하는 것 같죠?

‘이게 내자리라고 어떤 놈 들어오면 죽여 버리겠다고 경고하는 거래요.’

아침부터 새끼 먹이 주느라 계속 쉬지도 못하고 꽁지 털이 빠지도록 애를 써.

그 새들 인생 되어보고 나서 그런 말해요.

‘아 인생이 이렇게 고달픈데 저 개미는 나 같은 고민 안 할 거 아녀?’

그거 그렇게 부러워요?

어떤 때는 그게 부러울 때 있어요. 너무 인생사는 게 힘들 때는...그런 건 분심이죠.

우리가 하느님 앞에 첫 번째 감사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죠.

그게 첫 번째 감사거리예요.

 

두 번째 감사거리는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는데 그 중에서 예수님이 세우시고, 성령께서 지켜주시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대로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교회 천주교 신자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 감사해야죠.

이 세상에 사이비 종교 얼마나 많아요?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고 집안이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들이 오늘 부르심을 받고 왔듯이 여러분이 세례 받은 것은 여러분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 예요.

물론 어떤 사람은 이미 태어나 보니 아버지 어머니가 신자다보니 옛날에는 태어난 지 이틀 만에 물 부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시집가려고 보니 시댁이 천주교집안이라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아니면 친구 따라서 성당에 나와서 신자가 된 사람도 있고,

아니면 아무도 자기 인도해주는 사람 없이 자기혼자 문 두드린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지가 지발로 찾아왔던, 태어나서 이미 세례를 받았던 지간에 한사람도 예외 없이 내가 내 스스로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 그래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

 

여러분 대축일 이라든지 주일날 항상 신부님들이 강론이 끝나고 나면 바로 이어서 하는 게 뭐예요?

사도신경하죠?

옛날에는 종도신경이라고 그랬어요.

사도신경은 사도 때부터 내려오는 신앙고백이에요.

모든 신앙고백 모든 기도문 중에서 가장 오랜 된 것이 사도신경 이예요.

사도신경 안에는 참다운 교회가 갖추어야할 조건이 거기에 나와 있어요. 아까 얘기한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교회가 바로 참다운 교회라고 하는 것이 사도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서 2000년 동안 내려온 거예요.

 

그러면 천주교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하나라고 하는 뜻은 뭐예요?

똑같은 교리와 똑같은 경신례예요.

여기서 드리는 미사순서가 다르고, 미국에서 하는 미사순서가 다르고,

 아프리카 사람이 드리는 미사순서가 다른 게 아니죠?

물론 옛날 65년 전에는 모두 라틴어로 했어요.

그러나 65년 이후에는 각 나라말로 미사를 드리지만 내용은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 교리와 똑같은 전례가 천주교 신자들이 비록 여기 있다가 미국성당에 가더라도

 미국신부님 강론은 ‘ yes, thank’ 밖에 몰라도 ‘아 요때가 지금 헌금할 시간이구나.’

‘아~ 요때가 신부님 강론 끝나고 뭐라고 떠드는 것 보니까 사도신경이구나! ’때려 맞출 수는 있잖아.

교회가 하나라고 하는 것은 똑같은 교리와 똑같은 전례.

 

두 번째, 하나이고 거룩하다.

교회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신자들이 눈처럼 죄라고는

눈꼽만큼도 짓지 않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교회 안에는 밀과 가라지가 다 같이 섞여있어요.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눈에 보이는 이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아녜요.

교회 안에는 유다스도 있고 밀도 있고 가라지도 있어요.

교회가 거룩하다는 뜻은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교회를 성령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이에요.

 

만일 천주교가 사람이 만든 집단이라고 하면 옛날에 없어졌을 거예요.

그 중에 몇 놈만 잡아다 족치고 삼족을 멸해버리면 다 없어져요.

로마시대에, 선교지방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렇지만 천주교 없어지지 않았어요.

사람이 만든 교회가 아니고, 사람이 지키는 교회가 아니고, 누가 지키는 교회?

그렇지요, 성령이 지키는 교회이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거예요.

 

다른 신자의 나쁜 표양 때문에 냉담을 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사람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보고 성당에 다닙니까?

성당 안에 어차피 밀도 있고, 가라지도 있어요.

내 자신이 가라지가 될 때가 있고, 때로는 밀이 될 때도 있어요.

‘저 인간 보기 싫어서 성당 안 나와.’

‘아이구, 그 신부님 갈 때까지는 안 나와.’

미운 놈 피해 도망가 봐. 저쪽에 더 미운 놈 거기 또 있어.

더 미운 놈 피해 도망가 봐. 저쪽에 더 미운년 또 있어.

사람한테 휘둘림을 당하면 하느님 앞에는 한발자국도 못 나가고

맨날 백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지요.

아무리 분란이 많은 교회라 하더라도, 아무리 파가 많은 성당이라 하더라도 그 성당 없어지지 않아요.

그것은 자정능력,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에요.

 

어른이 될 때까지 아이는 걸음마 할 때 문지방에서 자빠져서 코가 깨질 때도 있고, 애들끼리

치고 박고 싸울 때도 있잖아요.마찬가지예요.

어느 공동체든지 처음부터 성숙한 공동체는 없다 이겁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가라지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성령이 지켜준다는 것을 믿어야 되죠.

그래서 교회가 세 번째로 거룩하다는 것은 바로 그 뜻이에요.

 

세 번째가 공번되다.

가톨릭이라는 뜻이 뭐예요?

‘공번 되다’ 는 뜻은 ‘보편적이다’ 그 뜻이에요.

남녀노소 빈부귀천 차이가 없어요.

 

여기 왕년에 군에 계셨던 분, 여기 계실지 모르지만 저도 군종신부를 했어요.

어느 부대에 부임을 했더니 성당 맨 앞자리에 뒤에 받침대에 용무늬도 그려져 있고

조각을 해놓은 근사한 의자가 있어요.

“이 의자 누구 거냐?”

했더니 사단장님 내외 앉으실 자리래요.

“이거 갖다 치워라.”

“성당 안에서 사단장이 어디 있냐?”

“아이구 사단장님 오셔서 자리가 없으면....”

부들부들 떠는 대위들에게 내가 책임 질 테니까 치우라 그랬어요.

사단장이 교우였는데 으례껏 자기 자리가 있을 줄 알고 시간이 다돼서 왔는데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 뭐 얼굴이 빨개지고 그 밑에 뭐 회장도 안절부절 못하고.....

그래서 내가 “저 뒤에 서서 미사하셔.”

미사 끝나고 난 다음에 또 풀어줘야 되잖아요.

차 한 잔 하면서 ‘사단장님 언짢으시겠지만 저는 사제입장에서 물론 나는 대위고 사단장님은 별 둘이면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그래도 여기는 성당 안 아니냐? 공인으로써 사제의 생각이 틀렸습니까?”

“네 신부님 제가 미처 그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저도 이제부터 일찍 와서 제자리 찾겠습니다.”

그다음부터 그 성당에서 그런 일이 없어졌어요.

높은 사람 자리 이렇게 따로 근사하게.....카톨릭이 뭐예요?

보편적인 교회에요.

높고 낮음 빈부귀천이 없는 주님 앞에 모두 죄 덩어리 인간이 오는 게 그게 바로 교회인데........ 신부님들은 차별 안하려고 애를 쓰고 노력해요.

저는 적어도 그렇게 살아왔어요.

뭐 가진 사람한테 뭐 그런 적 없어요.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네 번째가 사도로부터 이어 내려왔다.

첫 번째 으뜸 사도가 누굽니까?

베드로

그분이 1대 교황이예요.

지금 베네딕토 16세 교황님, 그분들의 협조자 동료들, 사제이고 주교들이죠.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특히 예수님의 이름을 갖고 있는 많은 종교들이 다 예수님이 세운 교회라고 주장을 해요.

그것을 규정짓는 기준이 뭐냐?

지금 얘기한 사도신경에 나오는 네 가지 기준에 맞아야 돼요.

네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맞지 않으면 변질된 교회예요.

 

세 번째로 감사할 것은 우리에게 엄마가 계시다는 것

천주교가 2천년 동안 산전수전, 지상전을 다 겪고 있는 교회이지만 그래도 가톨릭이 따뜻한 것은 우리 가톨릭 안에 엄마가 계시기 때문에 그래요.

아이들은 집에 들어오면 엄마를 찾고, 엄마가 없는 집은 늘 추워요.

엄마가 있으면 집안이 따뜻해요.

 

우리 교회에 엄마가 있다고 하는 것, 얼마나 큰 감사거리인지 몰라요.

예수님이 오늘 여러분을 불러서 여러분을 낳아준 영적인 성모엄마와 연결시켜 주신거예요.

 

예수님이 열 두 제자 불렀지요?

열 두 제자 가운데 무슨 직업이 제일 많이 나와 있다고 그랬어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인데 열 두명 중에 네 명이 어부예요.

 

예수님 입장에서 어차피 열두명을 정하시려고 마음을 먹으셨다면 좀 더 능력 있고, 돈도 있고, 빽도 있어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겠다...그런 사람을 불러야 되는데 어부들을 많이 불렀단 말이예요.

 

왜 예수님이 어부들을 많이 불렀을까?

세 가지의 이유 때문에 부르신 것이에요.

첫 번째는 무소유성 때문이에요.

갈릴리 호수는 자기 것이 아니지요?

어부들은 빈 몸뚱이 하나, 낡은 그물, 낡은 고깃배 하나가 전 재산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부들은 자기 것이라는 게 없어요.

그러다보니까 쉽게 포기할 수가 있어요.

 

많이 가진 자일수록 포기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농부들에게 ‘나 따라오너라!’ 하면

“아이고, 예수님 저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요...요즘 경기가 시원찮아서 땅 좀 팔려고 내놓으면 똥값 될 것 같아요...다 정리하고 주님 따라갈 테니까 휴대폰 번호 좀 알려주시면 칼 같이 쫓아가겠습니다.”

많이 가진 자일수록 포기하는데 핑계가 많아요.

이런 핑계, 저런 핑계~

 

우리 하루 밤 자고 나면 살날이 가까워져요? 죽을 날이 가까워져요?

해가 갈수록 비우고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데 숟가락이 하나 늘어도 더 늘고, 옷이 몇 개 늘어도 더 늘어요.

그래서 비우기가 참 힘들어요.

 

제 소원이 뭐냐!

나도 언젠가는 죽겠지요.

죽고 나면 장례미사도 치르고 신자들이 왔다가 돌아가면서 한마디 할 때 신자들의 입에서

“신부님 돌아가시고 난 뒤에 보니까 낡은 수단 한 벌, 쓰던 성무일도 하나 그게 그 신부님 전 재산이래.."

그런 소리 듣고 싶은데 아이고, 안 되네~~

해마다 뭐가 늘어도 하나씩 늘지...그래도 아무튼 목표는 있어야 돼.

그래야 흔들리다가도 목표를 바라보고 살아가지요.

 

어부들은 지 빈 몸뚱아리 하나, 같은 어부라 하더라도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불렀을 때와 야고보와 요한을 불렀을 때 그 두 쌍의 형제들이 포기하는 내용이 달랐어요.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불렀을 때 두 사람은 그물 하나만 버리고 다라나섰어요.그런데 똑같은 어부를 불렀어도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베데오와 삯꾼까지 버렸어.

따름에는 중간 과정이 포기가 들어가는데 포기는 사람마다 그 내용이 다르다

사제가 주님을 따라갈 때 포기해야 되는 내용이 다르고

똑같은 평신도라 하더라도 누구나 포기하는 것이 다 달라요.

 

같은 부부라 하더라도 남편이 포기해야 할 것이 다르고, 아내가 포기해야 할 내용이 달라.

아무튼 주님이 우리를 부른 첫 번째 이유는 무소유 때문이에요.

 

유명한 법정스님, 그 양반이 강원도 쪽에 움막집을 짓고 혼자 살면서 한 달에 한 번씩 길상사로 강의를 하러 다니는데, 그 양반 팬 중에 부잣집 회장님이 강의 끝나고 나오는데 스님에게 난을 하나 선물했는데 그 난이 삼천만원이 넘는다고 그랬어.

그 난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가지고 와서 불상 옆에 두었는데 절을 할 때마다 불상은 안 보이고 난만 보이더래 .

목탁을 두드릴 때 마다 불상은 눈에 안 들어오고 난만 눈에 들어오더래.

스님들은 공양하러 어디로 다녀야 하는데 비싼 난을 두고 어디 나갈 수가 없더래~

이 비싼 난을 두고 어디를 가나 .

 

내가 저 난을 소유하고 있는지, 저놈이 나를 소유하고 있는 건지....

한달 동안 낑낑거리다가 그 다음 날 길상사에 갈 때 그 회장한테 주고 나니까 그렇게 자유롭더라는 거야.

 

무소유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에요.

수의에 주머니가 없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요.

 

주님 앞에 오늘 저녁기도를 끝내면서

‘오늘 하루 종일 내가 버리며 살았던가!’

늘 주님 앞에 오늘 저녁기도를 끝내면서 미움덩어리가 몇 개 더 생기고, 없던 욕심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면, 그 날 잠들기 전에 그것 다 떼어버리고 주무셔야지요.

홀가분하게 주님이 부르시더라도 아무런 미련없이 떠날 수 있어요.

 

수녀님이 어릴 때 가르쳐 주신 내용 중에 사람이 죽으면 날개가 돋아나오는데, 가진 게 많은 사람은 가진 물건들이 나에게 달라붙는대요.

아무리 펄럭거려도 이놈의 쇳덩어리, 금덩어리, 땅, 통장때문에 몸이 뜨질 않는대.

이 세상에서 다 비우고 간 사람은 숨이 끊어지면 우아한 금날개가 돋아서 훨훨 날아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수녀님이 어릴 때 가르쳐주었어.

 

두 번째 어부들을 선택한 이유는 공동체성 때문이에요.

낚시는 혼자 할 수도 있지만 어부는 여럿이 힘을 합쳐야 되요.

기술이 발달해서 기계가 대신 한다고 해도 사람이 끌어야 해요.

배에 빙 둘러서서 어깨를 같이 맞추면서 ‘영차, 영차~~’ 하면서 힘이 센 사람은 힘을 낮출 줄 아는 지혜가 있고, 힘이 떨어지는 사람은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하고 열심히 하면서 공동작업이 이루어졌어요.

어부라고 하는 직업은 절대 혼자 할 수 없는 직업이었지요.

 

내가 빠지면 일이 안되고 저 사람이 빠지면 일이 안 되는 공동체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죽일 줄 알아요.

어부들은 직업상 자기 자신을 죽이는 법을 배웠던 거예요.

한 개인보다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지요.

다시 말하면 주님은 여러분 본당에 한 두 사람 뛰어난 성인 성녀 구원받는 것 원치 않아요.

내가 있는 본당 신자 모두 구원받기 원해요.

내가 있는 구역 모두 구원받기 원해요.

내가 있는 쁘레시디움 모두 구원받기 원해요.

내가 있는 단원 모두가 구원받기 원해요.

 

베드로 사도가 있는 천국 문 앞에 이렇게 써 있대요.

<개인 사절, 단체 환영>

 

세 번째, 어부를 선택한 이유는 어부라고 하는 직업은 위험 속에서, 파도 속에서, 그물질을 할 때마다 늘 죽음을 체험해요. 죽음의 밑바닥, 고통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은 저절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어 있어요.

 

차끼리 부딪혀서 차가 깡통이 되어서 119를 불렀는데 병원에 가서 검사했더니 타박상밖에 입지 않았다면

‘아, 주님이 나를 살려주셨구나!’

죽음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은 하느님을 체험해요.

농부보다는 어부들이 작업이 어려워요

 

요즘처럼 기계가 좋은데도 수만톤 되는 배가 태평양 바다에 빠지잖아요.

그 당시 시절에는 얼마나 많은 어부들이 죽었겠어요.

예수님이 생각하시기에 어부들한테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만 하면 두 마디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어부들을 택하신 거예요.

 

저는 군종신부할 때 많은 부대를 다니면서 미사를 했는데

내 기억에 제일 열심하고 제일 뜨거운데가 어디냐?

특전사, 공수부대

육신이 너무너무 고달프고 힘들어도 공수부대

 

비행기에서 떨어지고...이 비행기에서 낙하산에서 내릴 때 2만개 가운데 한 개는 펴지지 않아요.

비행기 밑에서 미사를 드릴 때 보면 고백성사 보면 다 총고백을 봐요.

미사를 드릴 때 정말 스폰지가 물을 쫙 쫙 빨아들이듯이 얼마나 뜨겁게 미사를 드리는지 몰라요.

미사 끝나고 비행기 탈 대 비행기에 불이 들어오면 비행기에 보면 떨어지기 직전이에요.

비행기 바닥을 보면 물이 흘러 다니는데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싼 거야.

“어떤 놈이 쉬 했어?”

“자, 신부님이 뛰어 내릴테니 신자든 아니든 성호 그어라. 주님, 우리 낙하산 천사가 받들어서 그야말로 스폰지가 땅에 떨어지듯이 가볍게 떨어질 것을 믿습니다. 아멘!”

 

문이 열리고 내가 먼저 뛰어내려요.

그런데 그 와중에 어쩌다 낙하산이 위에 것이 안 펴지는 것이 있으면 보조 낙하산을 펴야 하는데 당황을 하는 바람에 ‘어, 어~’ 하면서 기절을 해 버려.

떨어져서 논두렁에 처박힌 것 보면 뼈란 뼈도 없이 그냥 가루야.

 

그런데 방위병 앞에서 미사를 할 때 보면 군기만 빠진 게 아니라 심기까지 다 빠졌어.

미사하면서 코딱지 쑤시는 놈, 딴 청 피는 놈, 거울 보는놈

 

그러니까 늘 죽음을 가까이 느끼는 직업일수록 하느님을 쉽게 알게 되요.

 

어부를 부른 세 가지 이유

무소유성, 공동체성, 세 번째는 종말론성,

이 세 가지의 이유는 세례 받은 우리 모두가 한평생을 묵상해야 될 화두에요.

 

하느님께 불리움을 받은 자는 무소유에 대해 묵상해야 되요.

하느님께 선택받은 자는 죽을 때까지 공동체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이냐!

밟히는 존재이냐, 밟고 올라서려고 하는 존재이냐!

나로 인해서 공동체가 살아 나는거냐, 나 때문에 공동체가 깨지느냐!

 

선택받은 자는 하루하루를 마지막으로 알고

미사드릴 때마다 내 생애 마지막 미사로 알고

이 성지에 올 때 마다 내 생애 마지막 성지 순례를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성체를 영하는 마음으로 영해야 됩니다.

 

오늘 여러분들 성모님께서 불러 주셨어요.

오늘 처음 오신 분들도 있고, 정기적으로 계속 오시는 분도 있어요.

개 중에는 오기 싫은 것 억지로 오신 분들이라 하더라도 내가 내 발로 왔다는 생각 지우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미사 중에, 성시간 중에, 사제의 손을 통해서 주님의 성혈이 묻어있는 십자가 보목에 친구를 통해서 영이 병든 자, 영이 치유될 것이요, 육이 병든 자, 육이 치유를 받게 될 것이요,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자,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오늘 이 밤을 허락해 주신 감사의 박수를 드립니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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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티 성지 - photo by Y. Bened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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