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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708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07 조회수291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1년 7월 8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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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사도들을 보내시는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들이 이어집니다. 사도들 앞에 놓여진 길을 예수님은 이리 떼 가운데로 양을 보내는 것처럼이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죽음 앞에 놓여진 상황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이 표현이 말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본다면 사도들이 가야 할 길은 여러모로 새로운 깨달음이 됩니다. 


사도들이 가야 할 곳은 다른 민족이나 사마리아 지방이 아닌 이스라엘 안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 받은 능력과 사명 이외에 어떤 것도 지니지 못한 채로 파견됩니다. 그런 이유로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파견된 사도들은 같은 하느님을 믿고 알고 있다는 이들에게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것도 아무런 자격도 지니지 않은 평소의 모습 그대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람들 앞에 서야 하는 사도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분명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보내졌고, 그들을 사랑하며 모든 상황에 맞서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이스라엘에는 하느님이라는 이름 하나로 그들을 죄인으로 만든 수많은 조건과 문화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도들에게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라고 물으면 마땅히 예수님의 이름 밖에 내세울 것이 없는 사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조차도 마귀의 힘을 빌린다는 의심을 받는 처지에 이 사도들의 말이 어떤 취급을 당하게 될 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이 사는 곳이 이리떼가 사는 곳이 되어 버린 상황, 그 속에 사도들은 그들이 거저 받은 것을 지니고 아무런 대책 없이 진리와 선함과 사랑 만으로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하느님과 연결할 수 없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그러했듯 그들에게 자격을 따지고 그들의 출신을 물으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부정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이들이 등장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가야 하고, 서야 할 곳은 분명해 집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도대체 착하게 사는 사람들,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고, 병든자들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마귀들린 이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하는 이들이 이런 일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살지만 참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하느님이란 각자의 발전과 영화를 돕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사람들의 태반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반대로 그들을 판단하는 이들은 권력을 지닌 문화를 만들어 놓고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구조 속에 참 하느님의 진리는 사람들의 입에 의심 당하고, 놀림 당하며, 박해 당하는 처지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것도 대등한 처지에 있는 스승도 아닌, 도대체 어디에서 살았는지도 모를 사람들이 나타나 백성들에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하는 것이 이스라엘 지도자에게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그들이 하늘나라를 말하고, 메시아가 오셨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을 혼란 시키고 무지한 이들에게 헛된 꿈을 꾸게 하고, 죄인들을 두둔하는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맙니다. 


그래서 희망없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그 당연한 이야기를 사도들은 백성의 지도자들과 다른 민족들 앞에서 증언을 해야 하는 어이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안심시키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제자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이미 그들 안에 하느님의 마음이 새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한 행동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행동들이었고, 이런 삶을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명을 진심으로 실행한 이들이라면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에게 느꼈던 그리스도의 그 연민과 절박함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사랑을 전하며 자신들도 하느님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두려움 없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잘 준비된 답변이 그들이 만난 사람들과 나눈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나눈 그 삶이 결국 하느님의 백성 사이에 참된 고민을 던져 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이들은 한결 같이 그들의 삶의 모습을 묻고,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공격을 당하며, 때로 위협 속에서 가진 것을 빼앗길지 모릅니다. 그 모든 삶은 어쩌면 하느님의 뜻을 모르고 다 함께 이기적이었을 때는 일어나지 않을 분열의 모습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우리가 이겨야 할까요?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이들을 무찌르고 나서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견딘다는 것은 무엇인가 공격을 당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견딘다는 것은 최소한의 방어의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표현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사람들 앞에 보내진 사도들, 그들은 아무런 힘도 없이 사랑한 이유로 모든 것을 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들에게 던져지는 의심과 질문과 판단과 박해 앞에 그들이 견딜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은 사랑 이외에 어떤 것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말씀은 다른 마을로 피해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하느님의 백성이 사는 나라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두고 두고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하느님을 모든 이들이 아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서로의 경쟁에서 무엇 하나라도 더 가지는 것이 힘이 되고, 권력이 되며, 그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말하는 세상에 와 있습니다. 그야말로 전쟁터와 같은 세상입니다. 

이 험한 세상 안에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어떤 처지입니까? 하느님을 믿는 것도, 그분의 사랑을 하는 것도 전혀 처음 보는 이유도 이해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나마 사랑이란 말이 넘치는 터라 안심도 해 보지만 그 사랑이라는 것도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온 순수한 사랑이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한 수단 정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작 걱정스러운 것은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야 할 우리들입니다. 세상에 하느님을 전하라는 이야기는 도처에서 울려나오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애닳게 했던 그 상황이 그리스도교 안에 여전히 고쳐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사명을 전해야 할 이들이 오히려 참 사랑의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물어야 할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우리 중 누군가가 하느님께 받은 참 사명을 실행한다면 그는 우선 우리 안에서 박해에 놓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가 과연 옳은 삶을 살았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세상도 감동하는 하느님 참 사랑의 증언을 듣게 되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비가 와서 너무 부정적인가요? 그러나 복음과 우리의 현실이 이렇게도 닮아있다는 것에 정신이 버쩍드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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